선진(先秦)시대의 정통유학
‘돈 이야기’에 뜻밖에도 많은 독자의 반응이 있었다. ‘돈’이 호기심을 유발했는지 모르지만 정작 내용은 딱딱하고 재미없는 성리학 이야기였다. 그럼에도 지속적으로 관심을 보인 것은 피상적으로만 알고 있었던 유학, 성리학에 대한 새로운 해석에 흥미를 느끼지 않았나 싶다. 이미 말한 대로 우리의 유학은 성리학으로 인해 왜곡된 부분이 많다. 그래서 정통유학이 가지고 있는 본래의 가치마저 훼손되어 있다. 더 안타까운 일은 아직도 우리 유학자들은 성리학의 한계를 깨닫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답답한 마음에 용기를 내어 이번에는 우리가 놓치기 쉬운 공자의 정통儒學 이야기를 해보고자 한다. 공자의 유학을 先秦(선진)유학이라고 하여 송의 新儒學, 성리학과 구분하는데 양자는 분명한 차이가 있으므로 구분해야 유학에 대한 오해를 피할 수 있다. 儒學과 儒家는 통용되기도 하지만 구태여 구분하자면 유학은 학문적 차원이요, 유가는 사상, 학파 전체를 아우르는 말이다. 儒敎는 유가를 종교화한 이름이다. 그러나 유학은 종교가 아니므로 합당한 이름은 아니다.
공자가 유학을 창시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공자는 스스로 기존의 유학을 집대성했을 뿐이라고 <논어>에서 밝혔다. 集大成이란 ‘모아서 정리, 완성했다’는 뜻으로 창시와는 다른 개념이다. 혹은 <시경> <서경> <역경> 등 3經을 공자가 지었다고 생각하지만 <書經>은 앞서있던 역사기록을 정리, 편찬한 것이다. 편찬이란 자료를 정리하는 작업으로 새로운 사실을 지은 저술과는 다른 개념이다. 그것은 <書經>이라는 전래의 기록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經이란 공자 이전에 이미 존재했었다는 표지이다. <書經>은 上古부터 周까지 기록한 완성된 역사서이기에 經이라 했고, <春秋>는 周 이후 춘추시대를 공자가 기록한 것이기에 經이라 하지 않았다. 공자는 <춘추>로써 후세에 교훈으로 삼으려고 한다는 목적을 분명히 밝혔다. <詩經>은 당대의 민요가사와 제례악(祭禮樂)가사를 수집, 정리해서 305편으로 편찬했다고 공자 스스로 밝혔다. <樂經>도 있었다고 하지만 전하지 않는다. 추측컨대 <시경>이 가사집이라면 이는 악보집이 아니었을까 한다. <易經>은 전승된 卦辭(괘사)에 공자가 부연하여 <彖辭(단사)>를 붙인 것이니 공자의 저술이 아니라 기존의 <易經>을 정리 편찬한 것이다. 공자 스스로 <논어>에서 述而不作(술이부작)이라고 했는데 이는 기존의 내용을 풀이해서 기록할 뿐, 새로 지어내지 않는다는 말이다. <논어>의 문장은 투박하고, 간결한 문장으로 직접화법이 대부분이요, 체제가 산만하고, 설명적 진술이 거의 없다는 점에서도 공자의 저술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공자 사후의 편찬이니 당연히 經이라 하지 않는다.
<논어>에서 천명했듯이 공자의 道를 줄여말하면 ‘一以貫之(일이관지), 忠恕(충서)’였다. 一以貫之란 ‘하나로 꿰뚫는 도리’요, 忠은 ‘군주에 대한 충성’이 아니라 ‘변치 않는 항심(恒心)이요, 이웃에 대한 충심(衷心)’이었다. 恕란 용서가 아니라 ‘내가 깨달은 도를 이웃, 사회에 베푸는 것’이었다. 공자의 仁은 인간학으로서 사람의 근본도리였다. 仁이 개별윤리였다면 義는 사회윤리에 가까웠다. 군자는 통치를 해야 하는 책임이 있으므로 개인의 仁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집단윤리인 義에로 확장을 해야 했다. 그 원리를 以吾及人(이오급인- 나를 미루어 타인에 미치게 함)이라 했다.
공자가 추구하는 이상은 修身(수신)을 통해서 백성을 다스릴 수 있는 君子로 나아가게 하는 것이다. 그것이 공자 유학의 본질이요 목적이다. 평생 '가르치기를 게을리하지 않는다 誨而不倦회이불권'를 실천한 공자는 탁월한 교육자이다. 같은 개념이라도 사람에 따라서 다르게 설명한 방법은 학습자의 능력이나 특성을 고려한 맞춤형학습으로 현대교육이론에도 부합한다. '누구든지 가리지 않고 가르친다 有敎無類유교무류'도 공자의 평등주의 교육정신을 알 수 있게 한다.
禮는 유가의 형식윤리였다. 유가가 형식예절에 치우친 것은 허례허식의 병폐에 빠진 이유였다. 예의 집대성인 <禮記> <朱子家禮>는 후일 漢의 유학자들이 지어낸 것이다. 그러므로 유가의 허례허식을 공자의 책임으로 돌릴 수는 없다. <논어>에 '공자가 祭禮에서 매사를 남에게 물어보았다'고 한 것은 공자 이전에 이미 엄정한 제례형식이 존재했었다는 증거이다. 제관이었던 공자도 <논어>에서 형식보다는 마음이 더 중요하다고 누차 강조하고 있다. 공자는 비록 관혼상제례를 중시했지만 <예기>와 같은 과도한 형식예절을 내세우지는 않았다.
공자의 내세관은 무신론에 가까웠다. 제자가 鬼를 물었을 때 사람 일도 모르는데 어찌 귀신을 알겠는가? 또 죽음을 물었을 때는 生도 모르는데 어찌 死를 알겠느냐라고 했다. 祭禮에서 ‘귀신을 恭敬하되 멀리하라(遠)’고 했다. 이것이 敬遠이란 말의 내력이다. 또 하극상(下剋上)을 作亂이라고 했는데 이것이 '장난'의 어원이다. 공자가 병석에 누웠을 때 子路가 하늘에 기도할 것을 청하자 그런 기복적인 기도는 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공자는 非신비주의자요, 철저한 현실주의자였다. 공자가 제례를 중시한 것은 오직 죽은 자에 대한 산 자의 공경의 예에 지나지 않았으니 제례 이외의 사후세계에는 관심이 없었다.
공자가 몸소 실천한 덕목 중의 하나는 겸손이었다. 그의 겸손은 제자 顏淵(안연)을 자신보다 뛰어난 학자라고 실토하는 장면에서 드러난다. 모든 제자들이 이구동성으로 범접할 수 없는 스승의 경지를 찬송했는데도 불구하고 그들 앞에서 자신의 한계를 고백하고, ‘나는 천인출신이었기에 雜技(잡기)에 능하다’라고 한 것도 솔직, 겸손이 아니고서는 할 수 없는 말이다. 儒는 선비이기 전에 광대라는 의미도 있었으니 유가들은 원래 제사를 담당하던 무리들이었고, 그들은 잡다한 재주가 많아야 했다.
공자의 사상과 행적은 <논어>에 가장 잘 나타나 있지만 <논어>도 공자가 직접 저술한 것이 아니므로 논어의 내용을 전부 공자의 사상과 행적이라고 말할 수 없다. <논어> 후반부에는 反유가적인 도가사상도 같이 실려있는데 <논어>의 일관성을 해치고 있다. <논어>는 공자 사후에 제자들이 정리한 것이므로 공자의 본의가 아닌 부분이 끼어있을 수도 있다. 秦시황의 焚書坑儒(분서갱유)를 생각하면 지금 우리가 보는 <논어>는 원본과 차이가 있을 수도 있다. 언급한 대로 주희의 <논어> 주석 중에는 공자의 의도가 아닐 가능성이 많다. 특히 <詩經>의 비유적, 현학적, 도학적 주석은 <시경>을 거대한 ‘유가의 <시편>’으로 변질시켜 놓았다. 그런 의도적인 왜곡은 詩에 들어있는 순수한 인간의 정서와 문학적 예술미를 파괴했다. <詩經>에서 공자는 ‘詩三百 思無邪(사무사- 시에는 편향된 의도가 없다.)’와도 부합되지 않는다. 공자는 가장 질박한 유학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성리학자들은 정치적 도학자로 만들었고, 우리 유학계는 이를 맹신함으로써 역사를 퇴행시켰으며, 본래의 유가사상을 바로 보지 못하게 했다. 그러므로 주희는 공자의 죄인이고, 퇴계 율곡은 주희의 죄인이며, 아직도 성리학을 고집하는 유학자들은 다산의 죄인이다. 신유학의 유학왜곡은 필경 중국의 문화혁명 같은 유학혐오를 불러왔으니 공자가 지하에서 통곡할 일이다. 만약 성리학의 왜곡을 바로 잡고, 先秦의 유가정신을 살린다면 오늘날에도 그 가치를 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