熱血義人 맹자
(372-289)
맹자는 공자와 더불어 孔孟이라 불리며 유가의 亞聖으로 추앙받고 있다. 맹자는 '자고이래 공자를 능가하는 인물은 없다'고 칭송하면서 공자의 계승자로 자처하였다. 그래서 <맹자>에는 <논어>를 재해석, 부연하는 장면이 많다. <맹자>에는 <논어>에 비해서 수사가 뛰어나고 논리가 정연한 名文, 名句가 즐비하다. 원래 自暴自棄(자포자기)의 의미는 ‘禮義가 아닌 것을 말하는 것이 자포요, 예의를 포기하는 것이 자기’였다. 순우곤이 맹자에게 나라를 위해서 나서라는 의도로 ‘형수가 물에 빠졌는데 손을 잡아 구해주어야 하지 않겠는가?’라고 하자 ‘손으로는 형수를 구할 수 있겠지만 나라는 구할 수 없다- 叔手援嫂(숙수원수)’라는 명답을 하기도 했다. 당시에는 남녀구별이 엄격해서 형수가 물에 빠져도 손을 잡아야 할 것인가가 윤리적인 문제였다. 이 밖에도 助長(조장) 緣木求魚(연목구어) 與民同樂(여민동락) 五十步百步(오십보백보) 仁者無敵(인자무적) 反求諸己(반구저기) 易子敎之(역자교지) 등 빛나는 成語가 즐비하다. 맹자의 문장은 절묘한 비유와 명쾌한 논리, 호방한 논변으로 문장의 모범으로 꼽히기도 한다. <논어>는 에피소드가 직접화법으로 기록되어있는데 <맹자>는 이야기가 들어있는 택스트를 이루고 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지만 둘 다 후대에 기록되어진 점에서는 같다. <대학> <중용>의 체계적이고, 정연한 논리전개도 <맹자>의 문장을 발전시킨 것으로 보인다. 이런 점에서도 <대학>이 <맹자> 이전에 지어졌다고 하는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
맹자가 살았던 전국시대는 공자의 춘추시대보다 더 험난한 세상이었다. 정치적으로는 戰國군웅들이 할거했으며, 사상적으로는 諸子百家가 성행했다. 공자는 道家 정도의 도전을 받았지만 맹자는 당대에 성행하던 墨翟(묵적) 楊朱(양주)를 비롯한 縱橫家, 法家, 名家, 兵家, 農家 등의 百家爭鳴(백가쟁명)하는 거센 도전을 받아야 했다. 그래서 맹자는 천하의 道가 묵가, 양주 무리로 쏠리고 있다고 탄식했다. 그것이 맹자가 유가의 투사로 나선 이유였다.
맹자는 공자의 仁에 義를 더하여 체계화했다. 사실은 仁에 義도 포함된 것이었지만 맹자는 특별히 義를 강조함으로 해서 공자와 차별화를 시도했다. 공자는 周의 文王과 周公을 성인으로 삼았지만 맹자는 그보다 더 거슬러 올라가 堯舜(요순)을 롤모델로 삼은 것도 그렇다. 지금 세상에 내가 아니고서 누가 세상을 바로 할 수 있겠는가?(當今之世舍我其誰也)라고 호언하기도 했다. 성리학자들은 공자의 손자 子思가 맹자에게 도통을 이어주었다고 하지만 정작 맹자는 자사를 철저히 부정하였다. 맹자는 공자학파를 만난 적이 없었다고 단언했고(予無得爲孔子徒), 자신은 유학의 도를 스스로 책을 통해서 깨우쳤다(私淑諸人)고 장담했다. 제자들이 자신을 子思와 비교하면 노골적으로 불쾌해했다. 이로 보아도 맹자가 자사의 문인이라는 주희의 주장은 사실이 아니다.
맹자는 好辯家(호변가)라고 불릴 정도로 변론에 능하였다. 궤변론자들이 즐겨 쓰는 白馬非馬론-백마는 말이 아니다-도 맹자에게 배운 수단이었다. 말을 내세운다는 비판에 어지러운 세상에 변론을 하지 않으면 이단들을 누를 수 없으니 이는 不得已한 처사라고했다. 심지어 墨家(묵가)와 楊朱(양주)들을 애비도, 군주도 없는 짐승과 같은 무리들이라고 매도하였다. 告子는 당대 유수의 명사로서 無善無惡, 性白紙설을 주장하였다. 공자도 人性은 선도 악도 아니라 習性에 의해서 결정된다고 하였음에도 맹자는 性善說을 주장하였다. <맹자>에는 고자와의 치열한 논쟁의 결과에 대한 언급이 없었으나 맹자가 이길 수 없는 판세였다. 맹자가 성선설의 논거로 든 仁義禮智(인의예지)의 4端論은 논리적으로 불합리한 점이 있었다. 우선 인의예지를 갖추지 못한 사람은 사람이 아니라고 단정했지만 우물로 가는 어린애를 구하려는 惻隱之心(측은지심)이 없는 사람도 있을 것이므로 이는 논리적 오류이다. 4端은 고도로 수양된 엘리트급이나 가능한 일이지 그렇지 못한 사람은 이르지 못할 수준이다. 이러한 전제는 유가철학이 지배계층에 한정된 불평등사상이라는 지적을 피하기 어렵게 한다. 맹자가 성선설을 주장한 것은 인간을 긍정적으로 보아 교화시키자는 의도였지만 그것은 보편적 진리가 아니다. 지금도 맹자의 성선론은 논쟁의 대상이지만 시대가 지날수록 성선설은 당위성을 잃어가고 있다. 그러면서도 맹자는' 인간은 가르치지 않으면 금수처럼 된다(無敎卽近於禽獸)'고 함으로써 스스로 성선설에 배치되는 진술을 하고 있다. 맹자는 인의예지를 인간의 본성으로 규정함으로 해서 훗날의 4端7情, 理氣론이 극단적으로 대립하는 빌미를 제공했다.
맹자는 恒心-恒産론을 바탕으로 부국강병(富國强兵)론도 주장하였다. 경제적인 문제가 해결되어야 부모 공경하고 자식을 키우고 염치를 알 수 있고, 그런 후에야 부국강병도 가능하다고 주장한 현실주의자이기도 했다. 맹자는 反戰론자이기는 했지만 '전쟁에 대해서는 아는 바 없다'고 선언한 공자와는 다른 태도였다.
천하의 영재를 얻어서 가르치는 것이 '인생 3락'이라고 했으니 공자와 같이 敎育을 매우 중시한 교육자였다. 맹자는 敎育이란 말을 처음 사용한 사람이라는 사실도 기억되어야 할 것이다. 서구의 Education을 교육과 동의어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우리의 교육은 사회구성원으로서의 능력을 가르치는 것이므로 개인중심의 Education과는 다른 관점이다. 이를 구분하지 못하는 것이 오늘날의 교육위기를 불러왔다는 생각이다.
맹자는 뛰어난 상상력과 이상주의적 기질의 소유자였다. 浩然之氣 또한 맹자가 만든 名句이다. 그러나 그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제자의 물음에는 명쾌한 답을 하지 않고 있다. 大人, 夜氣, 不動心 등에서 초인적인 인간상을 말했을 뿐 구체적인 실체는 제시하지 않았다. 여기에는 현실주의인 <논어>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맹자의 이상주의, 관념적인 경향이 나타나 있다. 맹자는 인간이 선천적으로 타고난 능력을 良知, 良能이라고 했지만 그 역시 성선설을 전제하지 않고서는 설명하기 어려운 일이다. 양지 양능설은 후에 陽明學의 근간이 되기도 했다.
맹자는 열정이 넘치는 정치이론가요, 백성의 편에서 왕권의 횡포를 신랄하게 비판한 인권주의자이다. 백성은 貴하고 왕은 가볍다, 백성을 도탄에 빠트리는 왕은 갈아치워야(易位) 한다고 宣王의 면전에서 혁명을 선언하는 장면은 통쾌하기 짝이 없다. 나라의 3寶는 土地 人民 政事라고 주장한 곳에서는 인권주의자의 모습도 볼 수 있다. 이런 장면은 <논어>는 물론 어떤 유가경서에서도 찾기 어려운 것이다.
맹자는 뛰어난 학식과 기개와 변론술로 천하를 주유했지만 겨우 잠시 客卿의 대우를 얻을 수 있을 뿐이었다. 공자는 顔回를 비롯한 뛰어난 제자를 거느렸지만 맹자는 스승을 계승할 만한 변변한 제자 하나 없었다. 심지어 스승에게 당신이 그렇게 뛰어난 존재냐고 대드는 불손한 제자도 있었다. 그는 공자와 같은 인품과 권위가 없었던 것 같다. 공자는 道를 펼칠 수 있다면 불원천리 달려갔지만 맹자는 합당한 대우가 아니면 군주도 만나지 않았고, 명분 없는 보수 대우도 마다했고, 마음이 맞지 않으면 상대도 하지 않았으며, 군주가 마땅치 않으면 벼슬에 오르지도 않았을 만큼 자존심이 강했다. 뛰어난 변설로 군주들을 압도했지만 설복에 성공한 사례는 드물었다. 맹자에 가장 호의적이었던 宣王을 꼼짝못하게 몰아부쳐서 필경에는 못 들은 척 딴청을(顧左右而言他)하게 하고는 파직당하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오만한 맹자는 관직도, 제자도 제대로 누리지 못한 불우한 유학자였다. <맹자>의 체제가 정련되지 못했다는 점에서 구전되다가 漢대에 이르러서야 정착했음을 짐작케 하고, 나중에 주희에 의해서 라이벌 荀子를 누르고 四書에 편입되었다. 그 전에는 <맹자>는 유가 諸子 중의 하나일 뿐이었으니 과대평가된 면이 없지 않다. 공자가 지극한 聖人이었다면 맹자는 入堂未入室(입당미입실)한 義人이었다고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