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
분서갱유(焚書坑儒)는 진시황이 유가를 주적으로 삼아 그 경서를 불태우고, 유생들을 땅에 묻어죽였다는 끔찍한 문화파괴, 살육행위였다. 냉혹한 법치를 천하통일의 수단으로 삼았던 진시황은 나약한 仁義론으로 시건방을 떠는 유가들을 청산하고자 했다. 이 끔찍한 만행으로 인하여 중국은 근대에 이르기까지 문헌복구사업을 해야 했고, 학자들은 오랫동안 첨예한 대립을 벌여야 했다. 이천 년을 잃어버린 문헌복구 사업에 허비하였으니 분서갱유는 중국의 근대화를 망친 역사적 대참사였다. 진시황은 중국을 최초로 통일한 업적을 세웠지만 동시에 중국의 발전을 가로막은 역사의 죄인이었다. 중국을 통일하고서도 문화혁명 - 사실 문화혁명이 아니라 ‘문화학살’이었다. - 을 일으켜 중국의 전통문화를 말살해서 역사를 후퇴시켰던 모택동처럼- 이 두 사람은 중국의 흥망을 희롱한 절대폭군이었다. 그런데도 중국인들 중에는 지금도 이들의 죄과를 모르는 어리석은 사람들이 적지 않다. 우리가 아직도 무능폭군 대통령을 칭송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는 것처럼- 이러한 중국의 역사를 거울삼을 수 있어야 역사의 역주행을 면할 수 있을 것이니 재미있는 남 이야기가 아니다.
분서갱유 참사 이후 漢代에 이르러서야 유가들은 요행히 화를 면한 경서와, 경서를 암기하고 있는 유생들의 口述을 받아 적은 것을 모아서 대대적인 정비사업에 착수하였다. 그때에 수집된 先秦(선진)의 경서를 當代의 문자로 기록하였는데 이를 추종하는 학자들을 今文派라 했다. 이들은 구술된 경서를 이른바 ‘천인감응’(天人感應- 하늘의 도움을 받아)이란 신비론으로 정당화했는데 이는 하느님의 감도를 받아서 기록되었다는 기독교 <성서> 신비론과 같은 맥락이다. 漢 武帝는 董仲舒(동중서)를 오경박사로 삼아 유가의 경서를 정리하여 통치의 기반으로 삼았다. 금문학자들은 경전을 정치적으로 이용하기 위해 경전의 내용에 명분적 의미를 부여하는 데 힘썼다. 그것이 이른바 微言大意(미언대의-글 속에 성현의 큰 뜻이 숨어있다)의 원칙이었다. 그러다 보니 경서의 정확성, 사실성보다는 그 상징적 의미에 치중하여 경전의 原義에 어긋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게 되었는데 이는 경전으로서 신뢰성을 해치는 약점으로 지적되었다.
그 후 西漢에 이르러 魯王孔壁藏書(노왕공벽장서)가 발견되었는데 이는 공자의 후손이 분서갱유를 피하여 건물 벽 안에 경서를 몰래 감추어 둔 것이었다고 믿는 유학자들이 나왔다. 공벽에서 <상서> <논어> <효경> <춘추> <예기>등 다수의 죽간들이 무더기로 발견되었는데 그 문헌들은 先秦시대의 고문자로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이들을 古文派라 하였다. 이 경서들은 선진의 古文자로 기록되어 그 신빙성을 더 하였다. 그중에서도 <尙書> <春秋>는 금문파들의 것과 달라서 양 파 간에 眞僞의 논쟁이 가장 치열하다. 이들은 경전의 정확한 해독에 집중하였는데 이러한 학문을 訓詁學(훈고학)이라고 하였다. 훈고란 글자의 정확한 해독을 탐구하는 학문이다. 다시 말하면 금문파는 경전의 상징적인 意味에, 고문파는 경전의 原義에 충실하였다. 금문파와 고문파들은 서로 僞書라고 주장하여 상대방을 인정하지 않았다. 이것이 이천 년을 이어온 금문파와 고문파의 치열한 싸움이었다. 이러한 사정을 모른다면 올바른 유학을 수행할 수 없다.
금문파는 今文경서만을 진본으로 주장하고, 孔壁藏書(공벽장서)를 위조되었다고 하지만 분서갱유 후 백 년 뒤 무제 때에 와서야 기억에 의해 정착된 경서들이 얼마나 원전을 유지했는지 장담하기 어렵다. 더구나 그들은 경서복구에 전념하느라 경서해석에서는 철저하지 못한 측면이 있다. 이에 대하여 진시황의 분서갱유, 항우의 咸陽放火(함양방화) 때에 대부분의 경전은 소실되었다고 보는 것이 西漢 고문파의 입장이다. 그들은 정확한 경서해석에 힘써 금문파의 무리한 경서해석 태도를 비판하고, 口傳에 의존한 금문파들의 경서를 믿을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최근 공벽장서를 연대측정한 결과 위서라는 판정이 나왔다고 하니 그 역시 믿기 어렵게 되었다.
역사적으로 前漢은 금문파의 시대요, 後漢은 고문파의 시대였다. 이후 각축을 벌이다가 宋대에 이르러 성리학에 의하여 금문파들이 다시 힘을 얻게 되었다. 그들은 유가경전에 자신들의 이념을 덧칠하여 유학을 신비화, 관념화하기에 몰두하였다. 그 대표적인 예로 <시경>을 온통 유가이념의 노래로 변질시켜 원래의 의미를 왜곡하였다. 禮를 관혼상제의 형식논리로 왜곡하여 허례허식의 폐단을 일으켰다. 공맹유학에서는 있지도 않았던 理氣論을 구상하여 유학을 현실과 유리된 관념철학, 사변철학으로 변질시켜 空理空談(공리공담)을 일삼게 하였다. 또한 ‘변치 않는 마음’인 ‘忠’의 원래의미를 '군주에 대한 절대복종'으로 변질시켜 왕권통치의 명분을 제공하였다. 이런 가운데에서 현실을 직시하는 시민의식, 민주주의가 싹틀 수 없었으니 유학은 역사퇴행의 책임을 면치 못하게 되었다.
이러한 성리학에 대한 발발로 明대의 陽明學(양명학)이 나오고, 淸대에 이르러 考證學(고증학)이 출현하게 된다. 고증학은 고문파들이 주도하였는데 철저한 훈고학적 방법으로 정확한 경전해석을 통하여 관념화된 성리학을 비판하고, 선진유학의 정신으로 돌아가고자 하였다. 그들은 고문파를 추종하여 금문파의 경전이 부실하고, 그 해석이 본의에 어긋나있음을 비판하였다. 이에 고문파가 득세하고, 實事求是(실사구시)를 중시하는 하는 漢나라 때의 訓詁學(훈고학)이 다시 성행하였다. 그리하여 분서갱유로 무너진 先秦경서들을 수집, 정리하고 註釋(주석)을 모아 방대한 <四庫全書>를 편찬하기에 이르렀으니 이는 고문파의 성과요, 승리였다. 그러나 우리의 유학자들은 이런 성과를 도외시하고 있으니 아직도 성리학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성리학은 유학의 본질에서 멀어졌고, 고증학은 실증적인 연구로 경전의 해석을 바로 잡았지만 지나치게 자구해석에 얽매어 유학을 묵수적이고, 편협한 철학으로 만들었다. 금문파가 숲에 가려 나무를 보지 못했다면 고문파는 나무를 보다가 숲을 놓쳤다 할 것이다. 금문파이건 고문파이건 유학은 서양 신학문에 배타적이어서 중국의 근대화를 가로막는 과오를 범했다.
유학은 학문이라기보다는 본질적으로 통치철학이었다. 그 요체는 修己及人(수기급인-나를 닦아 다른 이에게 베풂) 해서 治國平天下에 이르게 하자는 것이다. 그러나 유가사상은 곧 불평등주의, 계급주의였고, 비민주주의이고, 수구적인 전근대적 사고였다. 뒤늦게나마 유학의 한계를 깨닫고 東道西器(동도서기 – 중국의 정신으로 서양의 문물을 받아들이자)를 표방하여 각성하려는 노력을 했지만 시대에 뒤떨어진 중국의 운명을 바꿀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유학의 가치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유학은 전근대적이면서도 합리주의, 현실주의, 실용주의였다. 비록 성리학에 의해서 그 본의가 변질되었지만 본래의 정신을 회복한다면 여전히 유용하다. 유학은 본래 인문주의였고, 엘리트의식에 의한 수범주의였다.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라는 역설에 흥분하지 말고, 공자의 정신에 충실하지 못했던 과오를 성찰하는 것이 유학자들의 본분일 것이다. 참된 유학은 서구의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윤리적 자산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