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어휘일기

베끼다

4.2

by Benjamin Coffee

[베끼다]


[동사]

글이나 그림 따위를 원본 그대로 옮겨 쓰거나 그리다.

; 책을 한 권 베끼다




베껴 쓴 텍스트만이 텍스트에 몰두하는 사람의 영혼에 지시를 내린다. 이에 반해 텍스트를 읽기만 하는 사람은 텍스트를 원시림이 지나는 길처럼 그 내부에 펼쳐 보이는 새로운 풍경들을 알 기회를 갖지 못한다. 그냥 텍스트를 읽는 사람은 몽상의 자유로운 공기 속에서 자아의 움직임을 따라갈 뿐이지만, 텍스트를 베껴 쓰는 사람은 텍스트의 풍경들이 자신에게 명령을 내리기를 기다리기 때문이다.


- 발터 벤야민, <중국산 진품들> 중




필사를 시도한 적은 많지만 한 번도 내진 못했다.


가장 훔치고 싶은 문장들은 물론 김연수의 것이었고, 별개로 필사를 가장 많이 시도한 것은 조세희였다.


결국 남은 건 난쏘공에 실린 첫 소설 '뫼비우스의 띠'에서도 앞 부분 일부만을 끄적인 게 전부였지만.


나만의 글을(그런 게 있다면) 쓰는 것도 어렵지만, 무언가를 그대로 베끼는 작업도 고단하긴 매한가지.

매거진의 이전글단편[斷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