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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enjamin Coffee Jul 12. 2016

짐승-영웅, 혹은 <포스 마쥬어:화이트 베케이션>

루벤 외스틀룬드, <포스마쥬어:화이트 베케이션>, 2014

모처럼 토마스(요하네스 쿤케 분)는 휴가를 내고 가족과 함께 프랑스의 스키장으로 놀러간다. 다음 날, 설경으로 둘러싸인 전망을 즐기며 그들은 야외 테라스에서 식사를 한다. 갑자기 퍼펑! 하는 소리와 함께 눈사태가 발생한다. “다 통제되었다.”며 토마스는 가족을 안심시킨다. 하지만 좀처럼 눈사태는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고, 결국 테라스를 뒤덮는다. 위급한 상황에서도 아내 에바(리사 로벤 콩슬리 역)는 두 아이를 품에 안아 보호한다. 그런데 거기에는 토마스가 없다. 그는 눈사태가 막 테라스를 덮치기 이전에 ‘혼자’ 빠져나갔기 때문이다.

                                 

다행히도 눈사태는 가짜였다. 사실은 눈사태가 아니라 눈 먼지에 불과했던 것. 도망쳤던 사람들이 우왕좌왕 테라스로 돌아오고 뒤늦게 토마스도 가족에게 돌아간다. 여기서부터 <포스 마쥬어: 화이트 베케이션>(이후 <포스 마쥬어>)은 본격적으로 시작한다.  

‘포스 마쥬어force majeure’란 불가항력을 뜻하는 프랑스어다. 불가항력이란, 사전적 의미를 그대로 옮기면, 사람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것을 의미한다. 자연재해 같은 것 말이다. 얼마 전 네팔에서 발생한 대지진 같은 경우도 불가항력이었다. (물론 일본이나 미국에서 같은 강도의 지진이 발생했다면 그 피해는 적었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그런 관점은 논외로 하자.) 이를 그대로 영화에 적용하면, 눈사태로 보였던 눈 먼지(앞으로 이걸 ‘눈사태 사건’이라 하겠다)가 바로 불가항력이라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문제는 그렇게 단순치 않다. 이대로는 이후 영화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토마스와 에바의 갈등이나 에바 혹은 토마스 스스로 빠지는 고뇌를 이해할 수 없다. 좀만 더 복잡하게 영화를 살펴보자.


1. 불가항력 – 토마스와 에바 ‘안’에서 

영화에서 진정한 불가항력은 사람 외부에서, 그러니까 눈사태 사건에서 오지 않는다. 물론, 눈사태 사건이 하나의 불가항력이었던 것은 틀림없다. 그런데 이후 전개되는 내러티브의 중심은 눈사태 사건 자체가 아니라, 눈사태 사건에 대한 에바와 토마스 반응의 차이에 있다. 그건 차라리 본능의 문제다. 곧, 인간 내부의 문제이자, 욕망(=금기의 원인)에 대한 문제인 것이다. 


에바는 ‘생존’의 본능보다 가족을 우선시 했다. 하지만 토마스는 눈사태 사건에서 가족이고 뭐고 무엇보다 자신의 안위만을 챙겼다. 여기서 더 이상 눈사태 사건은 중요하지 않다. 같은 상황에서 에바와 토마스의 반응이 달랐기 때문이다. 중요한 건 에바와 토마스의 내부에 있다. 둘의 결정적 차이는 결국 불가항력이 개인의 내부에 기원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눈사태 사건 이후 가족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한다. 이는 눈사태 사건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 가족의 균열은 이성에 우선하는 욕망으로서 불가항력에 대해 ‘인식’했기 때문에 벌어지기 시작했다. 셋째 날 저녁에 토마스가 문 앞에 주저앉아 아이처럼 엉엉 울며 고백하듯, 그는 바람을 피기도 하고, 아이들을 속여서까지 게임에 이기려고 한 속물에 불과했다. 그는 마침내 그러한 자신의 본능을 깨닫는다. 그는 눈사태처럼 그에게 쏟아진 불가항력을 절감했던 것이다.   

의미심장한 것은 에바의 심정 변화다. 에바 자체로 보면 바뀔 건 하나도 없다. 그녀는 위기 상황 속에서도 가족을 위해 헌신했으니까. 하지만 토마스의 행동은 에바를 뒤흔든다. 이건 단지 토마스와 에바의 관계에 대한 얘기가 아니다. 그녀 스스로 어떤 불안감을 감추지 못한다. 말하자면 그녀는 토마스를 통해 자신을 본다. 자신의 본능에 대해 되돌아본다. 


셋째 날, 혼자 스키를 타러 가겠다고 선언한 그녀가 토마스와 아이들을 보며 눈물 흘리는 쇼트를 기억하는가. 그 직전 씬에서 에바는 스키장에서 만난 여자와 대화한다. 거기서 여자는 본능에 따라 사는 자기의 삶에 대해 얘기한다. 에바는 그런 여자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말을 내뱉으며 불쾌한 표정을 짓지만, 왠지 그녀의 시선에는 비난보다는 동경이 가득하다. 그러므로 이후 에바의 눈물 쇼트를 단지 가족의 해체(이혼)에 대한 두려움으로 해석해선 곤란하다. 오히려, 그건 지금껏 본능을 억누르고 살아온 자신의 삶에 대한 회의와 더불어, 앞으로 본능이 불가항력적으로 자신에게 엄습하게 될 경우에 대한 두려움으로 봐야 한다. 


2. 몰래카메라 – 외부적인 불가항력 → 내부적인 불가항력 

그런데 여기서 외부적인 불가항력으로서 눈사태 사건이 어떻게 내부적인 불가항력으로서 본능에 자리를 내주게 되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결론부터 말하면, 그건 눈사태 사건이 눈사태가 아니라 눈 먼지였기 때문이다. 즉, 눈사태 사건이 ‘가짜’였기 때문이다.  


만약 눈사태가 눈 먼지가 아니라 정말 눈사태였다고 생각해보자. 그럼 <포스 마쥬어>는 재난 영화가 될 것이다. 재난 영화에서 자연현상은 그야말로 불가항력이다. 인간은 거대한 자연 앞에 얼마나 초라한가! 거기서 인간의 본성, 욕망에 대한 고찰이 들어찰 여지는 거의 없다. 일단 살아야 되니까. 정말 눈앞에서 사람이 죽어가고 있고, 나도 언제 죽을지 모르는 상황에서 그따위 고민이나 하고 앉아있을 수는 없다. 


하지만 눈사태가 사실 눈 먼지였음이 밝혀지는 순간 문제는 달라진다. 이는 ‘몰래카메라’에 빗대어 설명할 수 있다. ‘몰래카메라’는 이해할 수 없고, 또 어찌 할 수 없는 상황에서 그 대상이 어떻게 행동하는지를 관찰한다. 예를 들면, 샤워장에서 머리 감는 사람 뒤에서 몰래 샴푸를 계속 뿌린다거나, 자기 소속사 가수가 하루아침에 모두 다른 소속사로 옮기겠다고 선언하는 식이다. (모두 이경규의 ‘몰래카메라’에서 나온 상황이다.) 이때 중요한 건, 언젠가는 그러한 상황이 ‘몰래카메라’였음이, 그러니까 거짓말이었음이 드러나야 한 다는 데 있다. 이게 중요하다. 


‘몰래카메라’가 거짓말이 밝혀지는 것을 전제로 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할까. ‘몰래카메라’의 대상은 바보가 된다. 왜냐하면 그를 제외한 모든 이들은 이 상황이 거짓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자연히 사람들은 상황보다는 그 대상에 집중한다. 상황은 그에게만 당혹스럽고 불가항력적일뿐, 다른 이들에게 중요한 건 그 상황에 대응하는 그의 행동인 것이다. 거기서 그가 취하는 행동, 말, 제스처는 모두 그의 본성을 드러내는 기호로 인식된다. 우리는 ‘몰래카메라’를 통해 대상에 대한 새로운 면모에 감동할 수도, 실망할 수도 있다. 어쨌든, ‘몰래카메라’를 통해 우리의 초점은 그 대상에 맞춰진다. 

다시 <포스 마쥬어>로 돌아가 보자. 물론 눈사태 사건은 ‘몰래카메라’가 아니었다. 아무도 그것이 가짜인 줄 몰랐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눈사태라는 자연재해 그 자체였다. 하지만 결국 그것이 가짜라는 것이 밝혀진다. 여기서 <포스 마쥬어>는 오묘한 ‘몰래카메라’가 된다. 이를테면 사후적인 ‘몰래카메라’고나 할까. 처음 상황과 달리 눈사태 사건은 어느새 ‘몰래카메라’가 되어있다. 이후 눈사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중요한 것은 그런 상황 속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난 토마스의 본능이다. 


영화 곳곳에 다소 뜬금없는 쇼트들이 삽입된다. 그런데 그 쇼트들의 양상이 영화의 전개와 맞물리며 바뀌어 간다. 예컨대, 처음 씬에서 찍은 사진을 하나하나 보는 에바의 시점 쇼트가 있다. 이는 눈사태 사건 이전이다. 그 쇼트 자체로 보면 문제가 될 게 없지만, 그 전후 쇼트와의 맥락을 따져보면 이 쇼트는 확실히 이상하다. 직전 쇼트에서는 가족이 함께 스키를 타고 활강하고 있으며, 직후 쇼트에서는 가족들이 숙소로 돌아가고 있다. 시간적으로나 인과적으로나 두 쇼트 사이에 위에서 언급한 쇼트가 삽입되는 것은 좀 이상하다. 


눈사태 사건 이후 등장하는 ‘눈사태 쇼트’와 ‘광란의 씬’도 뜬금없기는 마찬가지다. 흥미롭게도, 두 쇼트 모두 앞에는 토마스의 쇼트가, 뒤에는 (토마스를 제외한) 가족의 쇼트가 배치되어 있다. 결국 위에서 말한 시점 쇼트와 아래의 두 장면은 공통적으로 가족을 담은 쇼트 사이에 위치하는 셈이다. 그런데 눈사태 사건 이전에는 시점쇼트마저 가족을 담는 반면, 눈사태 사건 이후에는 가족은커녕 자연현상(눈사태) 혹은 광란의 도가니 속에 토마스가 혼자 있을 뿐이다. 이는 눈사태 사건 전후로 변화하는 심경을 대변하는 것으로 읽을 수 있지 않을까. 쇼트가 뜬금없이 삽입된다는 것은, 인과나 합리적 전개를 벗어나는 것이니만큼, 일종의 무의식으로 존재하는 게 아닐까. 그렇다면 이러한 쇼트들은 결국 토마스나 에바의 무의식으로서, 외부적 불가항력이 내부적 불가항력으로 바뀌어가는 과정을 형상화한 것으로 볼 수 있다.  

  
3. 영화의 오묘한 결말  

그런데 영화의 끝 부분도 심상치 않다. 얼핏 전혀 다른 메시지를 함축하는 두 씬이 이어진다. 앞에서 토마스는 영웅이 되어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는 듯하나, 마지막에 토마스는 지금껏 아들 해리(빈센트 베테르그렌 분) 앞에서 피지 않았던 담배를 꼬나문다. 하지만 이 둘은 오류가 아니라, 토마스의 애매한 위치를 설명할 수 있는 역설이다. 토마스는 결국 본능에 따르지만도, 단지 본능을 거슬러 가족의 품에 안기지만도 않는다. 자세히 살펴보자. 


3-1. 영웅-되기(돌아가기) 


휴가의 마지막 날, 첫 날처럼 가족은 함께 눈앞이 뿌연 비탈을 내려간다. 그런데 갑자기 에바가 보이지 않자, 토마스는 에바를 소리 높여 부른다. “살려줘!” 먼발치에서 에바의 목소리가 들려오고, 토마스는 에바를 향해 달려간다. 이후 폭설로 하얀 눈앞에서 토마스가 에바를 안고 돌아온다. 그야말로 영웅의 귀환이라 할 만한 쇼트다.   

하지만 그건 (짐작건대) ‘자작극’이었다. 살려달라 외쳤던 에바는 토마스의 품에 안겨 가족에게 돌아간 뒤,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툭툭 털고 일어난다. 그리고 가족을 뒤로한 채 다시 위로 올라간다. 영화는 그 이후 아무것도 말하지 않지만, 아마 그녀는 스키 장비를 찾으러 갔으리라. 즉, 그녀는 애초에 어긋나버린 상황을 타개할 목적으로 ‘자작극’을 꾸민 것이다. 초라한 가장이 되어버린 토마스를, 휴가가 끝나기 전에 다시 영웅적인 가장의 자리로 되돌려두려는 것이다. 

결국 이 씬도 일종의 ‘몰래카메라’인 셈이다. 이번 대상은 해리와 베라(클라라 베테르그렌 분)였다. 하지만 이번 ‘몰래카메라’는 눈사태 사건과는 달리, 그것이 거짓임이 밝혀지지 않을 것이다. 혹은 거짓임이 드러난다 할지라도 그때쯤이라면 거짓말의 유효시효가 끝나있으리라. (즉 아이들이 성장하여 당시의 거짓을 가벼운 해프닝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불가항력은 눈사태 사건과 달리, 상황 그 자체에 있다. 상황이란 도식적으로 표현하면, ‘엄마의 위기->아버지의 구출->그로 인해 되찾은 가족의 평온’이다. 말하자면 이로써 아버지는 영웅이 된다. 영웅을 중심으로 ‘가족’이라는 판이 새로 짜인다. ‘몰래카메라’는 흔들렸던 가족을 다시 하나로 묶어주는 계기로서 기능하는 것이다. 


위에서 말한 영웅이란 매츠(크리스토퍼 히브주 분)가 말한 대로, 본능에 충실한 ‘짐승’의 반대편에 있는 존재다. 본능을 거스르고 대의를 따르는 것. 여기서 다시 오묘해진다. 왜냐하면 이미 토마스는 본능의 불가항력을 절감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새로 구성한 불가항력적인 상황에서 그는 ‘영웅’으로 존재한다. 말하자면, 거기서 그는 불가항력을 거스르는 존재다. 불가항력의 상황 속에서 불가항력을 거스르는 존재. 이러한 아이러니 속에 토마스가 서있게 된다.  


3-2. 담배를 꼬나무는 짐승-영웅 토마스 


이러한 맥락을 염두에 둬야 마지막 씬을 이해할 수 있다. 마지막 씬은 영화의 전반적인 요소들을 고려해봤을 때 굉장히 이질적이다. 무엇보다 그 씬은 차라리 재난 영화의 마지막 씬에 어울릴 법하다. 버스에서 내린 사람들은 아슬아슬 휘어진 도로를 따라 터벅터벅 걸어 내려간다. 이미 날은 어두워져 있고, 모든 이의 얼굴엔 피로가 가득하다. 그리고 그 중심에, 그리고 대열의 선두에 토마스가 있다. 왼손에는 해리의 손을 꽉 잡은 토마스의 걸음은 당차다. 카메라는 대열보다 한 걸음 빨리 뒤로 물러나면서 점차 해리를 선두로 하는 대열의 모습을 담는다. 


여기서 해리는 마치 영웅처럼 묘사된다. 재난 영화에서나 볼 법한 씬에서, 해리는 (이번엔) 정말 영웅처럼 듬직하다. 이는 위에서 말한 씬과의 연장선상에서 이해할 수 있다. 그는 이렇게 영웅으로 돌아왔다. 그는 다시 불가항력적인 본능을 거스르고 가족의 품으로 돌아왔다. 앞으로 그는 무슨 일이 있어도 가족을 버리고 나 몰라라 도주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정말 그러한가?  


옆에서 걷는 사람이 담배를 권하자, 토마스는 사양한다. 하지만 그도 잠시, 생각을 바꿔 담배를 받는다. 해리가 묻는다. “아빠 담배 폈어?” 잠시 생각하더니 토마스는 답한다. “응.” 아마 토마스는 지금껏 담배 피는 모습을 해리에게 보여주지 않았으리라. 혹은 담배를 끊었을 수도 있다. 가족을 위하여. 그런데 다시 가족으로 돌아간 영웅 토마스가 가족을 위해 끊었던(혹은 감췄던) 담배를 다시 피운다. 이는 그야말로 토마스의 역설적인 위치를 보여주는 장면이다. 다시 영웅의 자리에 오른 된 토마스는, 그러나, 본능이라는 불가항력을 절감한, 즉 짐승으로서의 자기 모습을 깨달은 영웅이다. 


* 이 글은 개인 블로그(http://byulnight.tistory.com/219)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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