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틴 스콜세지, <휴고>, 2011
<택시 드라이버>(1976), <성난 황소>(1980),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1988), <갱스 오브 뉴옥>(2002), <셔터 아일랜드>(2010). 마틴 스콜세지의 필모그래피를 따라오다 보면 <휴고>(2011)는 왠지 ‘갑툭튀’라는 생각을 저버릴 수 없다.
분위기부터 그렇다. 어딘지 음울하고 정신병적이고 지리멸렬한 흐름 와중에 <휴고>는 기본적으로 발랄하다. 차라리 <휴고>의 세계는 웨스 앤더슨이 만들어낸 동화적 세계에 가깝다. 거기다 영화는 일종의 주인공 휴고(아사 버터필드)라는 꼬맹이의 성장기다. 스콜세지와 아이, 그리고 성장기라는 소재의 만남은 낯설기 그지없다. 더 나아가 <휴고>는 영화에 대한 영화다. 이게 핵심이다.
결국 스콜세지는 그의 영화사에서 돌연변이 같은 영화를 통해 어떤 ‘멈춤’의 순간을 노렸던 것은 아닐까. 이를테면 수많은 영화를 찍어온 자기의 나날, 더 나아가 100년이 넘은 영화의 시간들을 잠시 기리는 순간을 말이다. <휴고>의 발랄하고 유쾌한 상상력의 세계가 왠지 아련함과 울적함을 자아내는 까닭이다. 전쟁을 막 끝낸 백전노장의 큰 한숨을 보는 느낌이랄까.
1.
영화는 휴고라는 고아와 자동기계, 그리고 영화라는 세 축이 맞물려 돌아간다. 그런데 좀 이상하다. 일단 고아, 자동기계, 영화라는 이 세 소재 사이에 연결고리가 거의 없을뿐더러, 아무리 소설 원작이라고 하더라도 자칫 초점이 흐려질 위험도 있기 때문이다. 영화를 위한 영화를 만들 계획이었으면 아예 조르주 멜리에스(벤 킹슬리)에 초점을 맞추면 될 일이었다.
그러나 영화는 맞물리는 세 지점을 효과적으로 구성했다. 오히려 휴고-자동기계-멜리에스(영화)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영화의 존재해야 하는 이유가 효과적으로 전달되었고, 영화에 대한 스콜세지의 애정은 극대화되었다. 이에 대해서 좀 살펴보자.
일단 휴고와 자동기계의 접점부터. 휴고는 수많은 톱니들로 구성된 시계를 유지하는 삼촌의 빈자리를 채우고 있으며, 아버지(주드 로)의 유일한 유산인 자동기계를 작동시키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또한 울적할 때면 찾는 시계탑 꼭대기에서 바라보는 파리 시내는 그야말로 거대한 기계다. 그렇게 휴고의 주위 환경뿐만 아니라 그의 머릿속에는 온통 기계들뿐이다.
이런 맥락에서 휴고가 세계가 하나의 거대한 기계라는 세계관을 갖고 있는 것은 자연스럽다. 더 나아가 휴고는 사람은 세계라는 거대한 기계의 한 부품이라고 여긴다. 뜬금없이 ‘자기의 쓰임’을 모르겠다는 이자벨(클로이 모레츠)을 시계탑 꼭대기로 데려간 뒤 휴고는 말한다. 기계에서 모든 부품들은 다 쓸모가 있듯이, 우리 인간들도 하나하나 쓸모가 있다고.
그런데 흥미롭게도, 직후 휴고의 그 말은, 세계관은 부정된다. 이자벨에게 자기의 세계관을 묵묵히 고백한 뒤, 휴고의 두 꿈이 이어진다. 두 번째 꿈에서 휴고는 돌연 자동기계가 되어버린다. 그리고 그를 둘러싼 모든 것들도 톱니바퀴가 된다. 말하자면 세계가 하나의 거대한 기계라는 그의 세계관이 형상화된 것이다. 하지만 자동기계로 변하는 자기의 모습을 보면서 휴고는 경악한다. 꿈이 무의식의 발현이라는 것을 인정한다면, 이제 휴고의 세계관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게 된다.
의식적으로는 자기를 기계의 한 부품으로 여기지만, 무의식적으로는 그걸 거부하는 것. 그건 아버지의 죽음 이후 끊임없이 자기의 존재 이유를 되물어야 했던 휴고의 상처를 나타내는 게 아닐까. 아무도 몰래 삼촌의 빈자리를 채우고 살아가며, 살아온 휴고. 반복되는 작업을 하면서 버틸 수 있던 것은 그의 사소한 작업이 시계를 움직이고, 파리를 화려하게 수놓고, 세계를 뒷받침하고 있다는 믿음 때문이었을 테다.
하지만, 휴고가 적극적으로 안착한 세계관 속에서 휴고의 삶은 곧 ‘인간소외’다. 아버지가 살아 있었다면, 아마 훌륭한 매커닉이 되어 기계를 만들었을 휴고의 기계화라는 아이러니는 사실상 <모던 타임즈>가 형상화한 웃픈 노동자와 다르지 않다. 기계에 대한 휴고의 이중적이고 중층적인 시선은 이렇게 이해할 수 있다. 그의 세계관은 불가피하게 (하지만 자발적으로) 마련된 결과물이다.
2.
이제 멜리에스와의 접점으로. 영화 중반에, 아버지에 대한 휴고의 기억과 열망이 통째로 멜리에스에 대한 걱정과 연민으로 바뀐다. 얼핏 뜬금없는 이 지점은 다음과 같이 이해할 수 있다. 우선, 자동기계가 결국 작동을 해서 남긴 기록에 멜리에스 영화의 한 장면과 그의 이름이 적혀있다. 아버지가 자동기계로 자기에게 메시지를 남겼으리라 믿었던 휴고에게 자동기계가 전달한 멜리에스라는 이름은 곧 아버지의 메시지다. 말하자면 이후로 멜리에스는 아버지를 대신하는 존재가 된 셈이다.
또한, 자동기계의 메시지를 따라 찾아간 멜리에스는 과거의 기억에 괴로워한다. 1차 대전 전후로 자기의 존재, 그리고 영화가 잊혔다는 끊임없는 불안 속에 살아왔음이 드러난다. 그런데 이는 곧 휴고가 당장 실감하고 있는 불안 아닌가. 휴고는 멜리에스에게 쉽사리 감정이입했으리라.
결국 휴고와 멜리에스가 만남으로써 휴고의 시선을 좇아왔던 관객은 멜리에스의 시선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곧, 영화에 대한 영화인의 실존적 불안, 그러나 그 어떤 것으로도 막을 수 없는, 쏟아질 듯 폭발하는 애정을 실감한다. 스콜세지가 자기의 필모그래피와는 다소 이질적인 제재, 즉 소년의 성장 스토리를 차용한 것은 이렇게 받아들일 수 있다. 성장기가 그렇듯, 관객은 성장하는 대상에 쉽사리 감정이입한다. 그러므로 멜리에스와, 그의 영화, 또한 영화 자체에 대한 헌사로서, 휴고는 굉장히 효과적인 중개자다.
3.
휴고와 멜리에스가 감정적인 동화를 한 이후, <휴고>는 초점의 흐트러짐 없이 줄곧 영화를 향한다. 휴고와 이자벨이 도서관에서 영화에 대해 다룬 책을 읽는 씬 이후 뤼미에르로부터 시작된 영화의 출발을 다룬 씬과, 멜리에스의 세트장과 영화 속 장면을 재현한 씬들에서는 스콜세지의 설렘과 즐거움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이루 말할 수 없는 그 경쾌함과 즐거움이란! 오로지 이를 위해 영화를 만들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아는 사람은 좋아하는 사람만 못하고, 좋아하는 사람은 즐기는 사람만 못하다는 말이 있던가. 여기, 전장을 즐기는 백전노장 마틴 스콜세지에 누가 대적하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