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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enjamin Coffee Aug 02. 2016

전향轉向, 혹은 <폭스캐처>

베넷 밀러, <폭스캐처>, 2014

시나 <폭스캐처>를 안 봤지만, 그래도 이 글을 읽고 싶은 이들을 위한 개략적인 줄거리부터.

                                

데이브 슐츠(마크 러팔로)와 마크 슐츠(채닝 테이텀) 형제는 올림픽 영웅이다. 둘은 1984년 LA올림픽 레슬링 종목 금메달리스트다. 그런데 왠지 마크는 형 데이브를 전적으로 의지하는 동시에 열등감에 빠져있다. 어느 날 명망 있는 듀폰 가문의 존 듀폰이 마크를 불러들여 ‘폭스캐처’ 레슬링 팀을 꾸린다. 세계선수권대회, 더 나아가 88년 서울올림픽 금메달을 목표로 훈련에 매진한다. 그런데 별안간 존은 데이브를 레슬링 코치로 섭외하고, 이후 존과 마크의 관계는 점점 멀어지는데...(스포 방지를 위해 여기까지) 

영화는 물론 존과 마크를 중심으로 다룬다. 그런데 둘의 관계는 모호하다. 우선 둘의 상황은 유사하다. 존은 노쇠한 어머니 듀폰 여사(바네사 레드그레이브) 앞에선 한없이 어린애가 되는 등 어머니에게 전적으로 의지하지만, 동시에 그녀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 친다. 마찬가지로 마크도 일찍이 이혼한 부모님을 대신해 자기를 키우다시피 했던 형에게 의지하지만, 위에서 말했듯 끊임없이 열등감을 느끼고 질투한다. 


하지만 엄연히 존과 마크의 관계는 위계적이다. 애초에 존은 마크의 후원자이며, 중간 연설 장면에서 마크가 말하듯, 존은 2살 때 부모님이 이혼한 이후 ‘마침내 찾은 아버지’다. 말하자면 둘은 수평적이면서 동시에 수직적인 관계다. 이런 중층적인 관계는 존과 마크가 유사한 상황에 있긴 하지만, 둘이 인식하는 상황이나, 심리적 불안을 타개하려는 방식이 제각기 다르다는 걸 암시한다. 


1. 마크 슐츠 


마크부터 살펴보자. 분명 마크에게 데이브는 애증의 대상이다. 부모를 대리하면서, 동시에 열등감을 불러일으키니까. 하지만 이 열등감은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어쩌면 많은 이들이 마크의 열등감이 레슬링 실력에 있다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실제로 감독은 영화 초반부에 마크가 한 초등학교에서 레슬링 금메달리스트로서 하품 나오는 연설을, 그것도 데이브를 대신해서 하는 씬을 배치한다. 거기서 마크에 대한 신뢰는 두 번 꺾인다. 투박하고 재미없게 말하는 데서 한 번, 그리고 그마저도 (아마 바빠서 못 갔을) 형의 이름으로 그 자리에 섰다는 데서 한 번 더.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마크의 신뢰는 한 번만 금갔어야 한다. 이후 그는 역시 로봇처럼 딱딱하고 무미건조한 말을 내뱉으며 있는 힘껏 인간미를 감춘다. 그러니까 첫 번째 금은 정당했던 셈. 그런데 레슬링에서라면 마크는 결코 형에게 뒤지지 않는다. 그는 형과 마찬가지로 84년 LA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땄으며, 이후 세계선수권대회에서도 보란 듯이 우승을 거머쥐지 않는가. 이렇듯, 왠지 영화는 처음부터 마크에 대한 부당한 흠집 내기부터 시작한다. 너무하다 싶기도 하지만, 두 번의 꺾임 끝에 마크의 자존감이 추락하는 씬을 영화 처음에 배치한 게 마크의 불안을 드러내는 데 더 없이 효과적이었고, 인상 깊었던 것은 사실이니까. 


어쨌든 ‘정당하게’ 봤을 때 마크가 데이브에게 부족한 것은 딱 하나, 바로 인간미다. 달리 말해 사회적 관계다. 실제로 마크는 와이프, 두 딸내미들과 함께 화목한 가정을 꾸리고 있다. 반면에 마크에게 형을 제외한 가족은 부재할 뿐만 아니라, ‘지인’이라고 칭할 만한 사람들도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하지만 문제는 더 복잡하다. 마크에게 데이브를 제외한 ‘관계’의 부재는 달리 말해 데이브가 ‘관계’의 유일한 전부라는 것과 같은데, 그런 데이브가 또 다른 ‘관계’로서 가족을 꾸리고 그들을 부양한다는 것은 정말로 마크에게는 어떠한 ‘관계’도 불가능할지 모른다는 것을 의미한다. 말하자면 마크의 열등감은 이중적이다. 그는 데이브에겐 있고 자기에겐 없는 것을 못 견디지만, 무엇보다 그에게 데이브가 없다는 것에 몸서리치는 것이다. 

마크가 존에게 헤어 나올 수 없이 의지하고, 빠져들게 되는 건 이런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 ‘인간미’, 그리고 ‘관계’의 문제에 대한 결핍과 데이브의 부재. 거기서 만난 (우리 관객이 아는 한) 최초의 외부인, 존. 마찬가지로 마크에게 존은 이중적인 존재일 수밖에 없다. 일차적으로, 존은 마크에겐 없었던, 하지만 데이브에겐 넘쳐났던 ‘관계’다. 마크에게 존은 그 자체로 ‘자랑거리’다. 숙소에 찾아온 존을 데이브 가족이 성의 없이 대하자 마크는 버럭 화를 낸다. 존과의 관계가 깊어질수록 마크가 존을 멀리 하고 그의 전화를 아무데나 툭 끊어버리는 것도 마찬가지다. 전화기를 끊은 뒤 못 들어주겠다는 표정을 짓는 마크의 속내는 이러지 않았을까. “형이 그랬듯, 나도 형 없이 충분히 살 수 있어.” 


하지만 데이브의 부재 그 자체도 마크에겐 크나큰 결핍이었다. 마크가 존에게 ‘올인’한 것은 애초에 데이브의 부재를 채우기 위한 것에 불과하다. 어쩌면 존은 마크에게 아무 것도 아닐지 모른다. 존은 그저 데이브의 텅 빈 자리를 채우는 현상 혹은 가면일 뿐이다. 그런데 재밌는 건, 데이브도 마찬가지로 하나의 ‘현상’일 뿐이라는 것이다. 이미 중심은, 본질은 거세당했으니 말이다. 마크가 데이브에서 존으로 그렇게도 쉽게 갈아탈 수 있었던 것, 그리고 데이브를 잊을 만큼 존에게 천착했던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다. 어쨌든 현상이자 가면으로서 존은 마크에게 가볍게 떨어져 나간다. 


마크에게 필요했던 것은 형을 벗어난 ‘관계’이자, 형을 대리할 존재였다. 그때 나타난 든든한 후원자이자, ‘아버지’, 그리고 친구 존은 적격이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존은 대리자일 뿐이었다. 그만큼 마크는 존에게 쉽게 빠져들었고, 또 꼭 그만큼 쉽게 벗어난다. 이제 남는 자는 데이브에게 돌아간 존과, 어머니의 죽음과 존의 등 돌림 이후 오롯이 혼자 남은 존이다.    

2. 존 듀폰 


이제 존 얘기를 해보자. 마크에게 데이브가 있었다면, 존에게는 어머니 듀폰 여사가 있다. 그녀에게 머리 희끗한 존은 여전히 철부지 ‘어린 아이’로 남아있다. 가만히 보면 누군가 연설문이라도 써준 듯 차분히, 하지만 어딘가 쫓기는 듯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는 모습이나, 단단히 뿔난 마크 주위를 ‘아장아장’ 뛰어다니는 씬, 어머니와 독대한 자리에서 ‘기차 장난감’ 얘기가 오고가는 씬 등에선 그야말로 갓 초등학교에 들어간 아이의 모습이 번진다.  


그런데 듀폰 여사는 ‘철부지’ 존이 레슬링을 후원하는 것을 못마땅해 한다. 그런 ‘천박한 스포츠’나 후원하고 말이다. 그럼에도 존은 ‘엄마 말 안 듣고’ 계속 레슬링에 집착한다. 그런 식으로 존은 어머니의 그늘에서부터 벗어나려고 발버둥 친다. 여기서 우스꽝스러우면서도 애잔했던 씬. 레슬링 훈련장에 듀폰 여사가 휠체어를 타고 처음 찾아온다. 레슬링 실력이라고는 마크에게 살짝 배운 게 전부였기에 멀리서 훈련을 지켜보기만 하던 존은 갑자기 선수들을 불러 모은다. 자기를 중심으로 반원형으로 둘러앉게 한 뒤, 어머니가 계시는 방향은 비워 둔다. 거기서 존은 일장연설을 시작한다. 레슬링이란 어쩌구저쩌구. 아슬아슬 시범까지 보인다. 그는 선수들과 동시에 어머니를 향한다. 어머니는 둘러앉은 선수들 한 가운데 비어있는 틈으로 서있는 존을 본다. 

그러니까 그 씬은 사실상 존이 구성한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철저히 어머니의 시선을 고려해서 자기를 포함한 사람들의 배치를 짰다. 위대한 레슬링 코치로서 자기의 위엄과 전문성을 과시해서 어머니의 인정을 받기 위해서 그는 어머니를 위한 단편연극 혹은 단편영화를 만든 셈이다. 마크와 그를 둘러싼 선수들을 향한 듀폰 여사의 시점쇼트가 그토록 인상적인 까닭이다.  


이렇게 존은 계속해서 어머니가 반대하는 ‘레슬링’에 집착하면서 어머니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고자 한다. 하지만 동시에 그는 어머니의 인정에 목말라한다. 비유컨대 그는 어머니 주위를 계속 원운동하고 있을 따름이다. ‘독립’이라는 원심력과 ‘인정’이라는 구심력이 맞물리기 때문이다. 마크와의 첫 만남에서 듀폰 가문, 나라 운운하면서 레슬링 우승을 그토록 강조했던 것도 마찬가지다. 존에게 레슬링 자체는 어머니에게서부터 벗어나는 과녁을 겨누지만, 그게 불안한 존은 ‘안전모드’ 설정을 해둔다. 위대한 조국 미국을 위한, 듀폰 가문을 위한, 그리고 어머니를 위한 레슬링이라는 대의(大義)는 존의 고삐를 꽉 쥐고 있다. 결국 존은 어머니로부터 도망치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어머니의 울타리 안에서일 뿐이다. 


듀폰 여사의 죽음 이후 존의 상태는 급격하기 악화된다. 어머니의 죽음 직후의 쇼트에서 존은 어머니가 애지중지하던 말들을 마구간에서 풀어준다. 물론, 존이 소유한 거대한 땅 어디에 있든지 갇혀 있는 것은 마찬가지일 것이다. 하지만, 존이 가뒀던 말들을 하나하나 풀어주는 행위는 어머니의 죽음 이후 어머니라는 거대한 울타리가 허물어진 존의 막연한 상황과 맞물린다. ‘장벽이 무너지자 모든 것이 장벽이었다’는 이문재의 시구처럼, 어머니라는 울타리가 허물어지자 모든 것이 울타리가 된다. 울타리를 넘어서기 위해 고투해온 그의 눈앞에서 울타리가 사라졌다. 더 이상 그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그토록 원하던 무기를 앞에 두고도 고개를 돌리고 있는 존의 초점 없는 눈처럼, 그는 의지와 방향을 상실한다. 

이후 존은 뛰어난 레슬링 코치로서 자기를 칭송하는 다큐멘터리를 제작한다. 이는 어머니라는 울타리를 상실한 존이 자기만의 울타리를 짓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에게 울타리가 있었나? 어머니의 울타리는 이미 없어진지 오래. 거기다 미국, 듀폰 가문, 어머니에 기대온 존의 삶에는 스스로 세워 올릴 울타리가 없다. 이제 존은 모든 걸 다 가졌지만, 그에겐 필요한 또 다른 울타리, 즉 ‘힘’이 필요하다. 그건 존이 가지지 못한 것, 레슬링의 권위자 데이브다. 하지만 존은 데이브의 인정(결국 다큐멘터리 마지막 데이브 인터뷰는 실리지 않았다)을 끝내 받지 못한다. 영화의 마지막 파국은 극단적인 인정에 대한 갈구는 같은 대상에 대한 제거와 맞닿아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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