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혜정, <왕자가 된 소녀들>, 2012
여성국극이라는 것을 ‘왕자가 된 소녀들’을 통해 처음 알게 되었다. 그런데 좀 묘한 건, ‘왕자가 된 소녀들’이 담은 영상들은 여성국국의 현재 모습들이겠지만, 이는 사실상 ‘왜 여성국극은 이렇게까지 쇠퇴하였는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과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영화를 보면서 나의 위치는 좀 애매해질 수밖에 없었다.
영화를 보기 전, 여성국극이라는 것은 여성들로서만 이루어진 극의 형태이다, 하는 정도의 조잡한 사전 지식만을 갖추고서 플레이 버튼을 누를 때 내가 우선적으로 마련했던 것은 변명이었다. 지금까지 여성 국극이라는 것이 있다는 사실조차 몰랐던 이 미천한 교양 수준에 대해서 어떻게 변명할 수 있을까. 말하자면, 나에게 이 영화는 무엇보다 먼저 엄한 선생님이 되어야만 했다. 필사적으로 나의 무지를 숨기기 위한, ‘몰랐음=앎’의 변명들. 그런데 영화는 도대체 여성국극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주지 않았다. 가르쳐 준 것이라고는, 내가 미리 준비했던 사전지식의 수준. 영화는 끈질기게 현재를 언급하고 있었다. 달리 말해, 어떻게 보면 영화는 우리의 이야기를, 어쩌면 나와 무관하지 않을 것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는 셈이었다.
정신을 차리고, 그렇다면 여기서 내가 해야 할 것은 무지를 메우는 것이 아니라, 내가 경험하는 것들, 나의 주변에 있는 것들을 다시 한 번 둘러보는 것이리라. 더 이상 나를 위한 변명이 아니라, 우리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야 했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의 위치는 좀 애매해질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어떤 부끄러움 혹은 질책을 예상하고 이를 덜기 위해 영상에 몰입했었지만, 정작 영화 말미에 나는 그녀들에게 위로, 혹은 응원의 메시지를 소리 없이 보내고 있었다.
그렇다면, 그들은 왜 쇠퇴할 수밖에 없었던가. 정확히 말하면, 그들은 왜 정부(권력기관)에게서 버림받아야 했는가. 그게 어떤 불편함 때문이라는 것에는 이견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남장을 하고, 남자의 목소리를 내는 여성들. 왕자가 된 여성들. 그녀들은 정말로 왕자가 되고 싶었던 게 아니라 왕자가 이미 되어버렸다. 언뜻 보이는 남성혐오적 감정들, 결혼을 회피하고 싶었으나 어쩔 수 없이 하게 되었던 사람들, 그리고 주저 없는 후회. 문득 문득 이들이 여성이라는 사실에 놀랐다. 팬의 부탁으로 결혼식을 가장하여 찍었다는 사진을 보고 느껴지는 어떤 섬뜩함. 남장을 한 여배우가 (여장을 한) 여배우를 뒤에서 끌어 안을 때의 묘한 떨림. 그건 여자가 여자를 쓰다듬듯 뒤에서 안았기 때문이 아니라, 또, 너무 완벽하게 남성적인 모습을 하고 있어 그 남자가 사실은 여자임을 까마득히 잊어버려서 이건 마치 남성이 여성을 껴안는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 아니다.
묘한 떨림은, 여자임을 알면서도 여자라고는 믿기 어려운 남자가 여자를 뒤에서 끌어안을 것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불편함이 낯섦에서 시작한다는 내 생각이 맞으면, 이 모든 것은 낯설고 불편하다. 권력, 법, 혹은 제도 등은 정상성/비정상성의 이분법적 틀에 판단의 근거를 마련해 놓고 있기 때문에, 그네들의 눈에 이들은 어디까지나 외부적 존재들인 것이다. 권력의 부름을 받는다는 것, 그러니까 영화에서 말하듯 60년대 위기를 겼었던 수많은 예술단체들이 살아남았던 것은, 다른 말로 하면 그들의 정상성을 인정받았다는 것이 된다. 그 근저에는 정상성을 규정하는 정치적 메커니즘이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남녀 혼합 단체가 정부의 지원을 받았다는 사실도 이를 보여준다. 이성애를 근간으로 하는 젠더 정치의 일환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불편한 비정상적 여성 국극이 쇠퇴한 이유도 마찬가지의 정치적 의미로 이해할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