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부터 비가 내렸다. 오늘 일정은 다소 여유로웠다. L이 늦잠을 잤다. 기다리다 목이 말라 간단한 요기거리라도 좀 살 겸 마트로 갔다. 한 진열장에 신라면이 있었다. 한 컷 찍었다. 플러싱은 역시 한인 거주촌이다. 다른 곳에서는 일본 라멘밖에 보지 못했다.
첫 날 봤던 아랍계 점원이 내 바나나 티셔츠를 보더니 앤디 워홀이 뭐하는 사람이냐고 물었다. 난감한 질문에 곰니하고 있는데 그림 그리냐고 다시 물었다. 팝아트, 라고 답했다. 약간 난감한 표정을 지어 대충 설명하려는데 말이 잘 안 나와 버벅거렸다. 그랬더니 자기도 팝아트 안다며 손사래를 쳤다. 다행이었다. 먹을 것들을 다 챙기고 숙소로 돌아왔다.
12시가 다 돼서야 숙소를 나섰다. 아침을 어떻게 해결할까 하다 집 앞 델리에 들렀다. 밥 위에 고기를 얹은 음식을 두 개 사들고 숙소 식당에서 먹었다. 나는 소고기를 L은 염소고기를 도시락이었다.
늘 델리의 저렴하고 푸짐한 음식에 감탄했지만 이번엔 사람이 먹을 만한 음식이 아니었다. 양념이 달지도 짜지도 않고 맹맹한 데다 웬 기름이 그렇게 넘쳐나는지. 제육볶음 소스쯤 생각하다가 첫 숟갈부터 실망했다. 염소고기나 맛볼까 했더니 질감이나 모양새가 꼭 개고기 같았다. 소고기는 너무 익혀 삼키기가 힘들 정도. 씹고 씹어도 좀처럼 잘리지 않고 입속을 헛도는 기분이란. 아, 고기만 주워다 먹고 기름범벅이 된 밥은 버렸다. 그래도 배가 부르긴 했다. 니글니글.
오늘 일정은 하이라인을 따라 걸으며 첼시 지역을 쭉 돌아보는 거였다. 하필 실외 도보여행을 잡은 날 비가 억수로 쏟아질 건 뭐람. 일단 하이라인은 포기했다. 나중에 혹시 날씨가 풀리면 가는 걸로.
첼시 지역 투어는 대부분 게이들의 인권운동을 위한 투쟁의 장소들로 이뤄져 있다. 크리스토퍼 파크에서부터 게이스트리트까지. 밥 딜런과 관련된 곳들도 있었는데 건너뛰었다. 비가 갈수록 많이 와서 여행을 제대로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투쟁의 첼시 코스를 간단히 끝마치고 워싱턴 파크로 향했다. 내가 알기론 영화 어거스트 러시의 촬영지인데 정확하지는 않다. 평소 바로 옆 뉴욕대 학생들이 쉼터로 애용한다. 종종 체스를 두는 학생들의 모습을 볼 숭 있다는 설명과는 달리 날씨가 날씨인지라, 게다가 방학이라서 그런지 사람은 눈곱만큼 찾아볼 수 있을 정도였다. 대신 빗방울들과 빗소리로 가득 찼다. 공원은 더더욱 넓게만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