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에서 어떤 말을 들어도 부디 담대하게 받아들이길.
어쩌다보니 여권을 여러 개 가진 아기를 낳게 되었다. 여기저기 검색해 본 끝에 한국 호적에는 내 성을 물려줄 수 있으며 나중에 여권 상 영문 이름은 외국 여권이름과 같게 맞춰줄 수 있다고 했다. 대부분 한국에서의 삶을 고려해서 한국호적은 '평범'한 한국이름으로 올려준다고들 했다. 나도 비슷한 생각을 했다. 그리고 내 성을 물려줄 수 있다는 점도 맘에 들었다.
영사관에서 여러 파일을 다운로드받아 출생신고서에 내 성을 적었고 한자도 또박똑박 적었다. 본도 내 본을 적어넣었다. 이름의 한자 부분에는 고민을 많이 했다. 나는 종교도 없고 혈액형도 안 믿고 어디 분수대에 가서 동전 한 번 던진 적 없던 사람이지만, 굳이 작명서를 찾아읽고 옥편을 뒤져서 사주와 수리와 음양오행을 따져 길하다는 한자도 찾았다.
서류를 모두 정리해서 영사관에 갔는데, 청천벽력같은 말을 들었다. 한국 호적에 별도의 한국 이름을 올려줄 수는 있지만, 외국 여권에 오른 이름과 한국 여권 상 영문이름을 맞춰줄 수는 없다고 한다. 이거 맞추려고 일부러 외국 여권 미들네임에 내 성을 넣어놨는데! 차근차근 설명을 들어보니, 성이 같고 이름이 다른 경우에는 완벽하게 여권 영문 이름을 맞출 수 있다. 성이 다른 경우에는 남편 성을 추가로 넣어주는 것일뿐이라고 한다. (한국여권에는 성이 두 개가 나란히 적히게 되므로 외국여권과 동일하지 않다.) 나처럼 성도 다르고 이름도 다르게 넣으면 맞춰줄 수가 없단다.
당황해서 일단 서류를 철회하고 돌아왔다. 여기저기 검색도 해보고 사람들에게 물어보기도 해보니 한국이름을 다르게 만들어준 사람들이 많고 별 문제는 없다고 했다. 하지만 남편은 나중에 학교나 보험, 세금 등 서류 오갈 때 문제가 생길 수 있다고 그냥 영문 이름 그대로 넣자고 했다. 한국에 있는 한국사람들은 대부분 한국에서의 삶이 '불편'할거라며 한국 이름을 만들어주는게 좋겠다고 했다.
남편은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물었다. 대체 뭐가 불편하다는거야?
남편은 한국에서 이름이 세 글자가 아닌 것이 얼마나 불편할지 전혀 이해를 못 했다. 학교에서, 병원에서, 일곱글자짜리 내 아기의 이름이 옆으로 툭 튀어나와서는, 선생이나 간호사가 어색하게 길게 부를 때 모두가 쳐다볼 그 광경을 모른다.
한국은 모든게 똑같아야 해. 이름도 세 글자여야 하고 엄마 아빠도 둘 다 한국인이고 멀쩡하게 살아있어야 하고 장애도 없어야 하고 머리카락색도 똑같아야 하고 옷 사이즈도 하나를 입어. 어떤 어린이집에서는 다문화가정 자녀를 안 받는다고 했고 나는 결혼 이후로 365일 사람들이 신기하게 얘기하는걸 들어왔어. 칭찬을 해도 그 속에 차별이 깔려있는 거 알아? 한 발 물러서서 이름이 네 글자여도 돼. 하지만 일곱 글자는 안 돼. 애들이 괴롭힐거야. 다들 내 딸을 동물원 원숭이 보듯 할 거라고!! 나는 짜증을 냈다. 이제까지 들은 다문화가정 이야기들이 내 머리를 스쳤고 나는 아이가 커서 이름을 불릴 때마다 움찔하는 모습을 상상했다.
내 여권의 이름은 아버지가 한 자 한 자 띄어쓰기를 해서 영어로 기입해주신 바람에 영미권에 가면 각종 서류에서 이름 한 자가 미들네임으로 빠지기도 하고, 관공서나 병원에서는 가끔 어떻게 읽어야할지 몰라 당황해한다. 예를 들어 김희진이 이름이라 치면 병원대기실에서 다들 '하이'라고 불러야할지 '히진'이라고 불러야할지 몰라서 머뭇거리며 두 번 부른다. 그 동네 사람들은 그럴 때 아무도 나를 쳐다보지도 않고 이상하게 생각하지도 않지만 나는 괜히 움찔한다. 외국인이라고, 그 자리에서 나 홀로 튀는거 같아서. 한국에서 살아왔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조건반사. 한국에서 누군가 7글자 이름을 부르면 모두가 쳐다볼 것이다.
나는 내 아기가 한국에서 어디를 가도 불필요한 시선을 받으며 살아갈거라는게 싫었다. 나한테 오바 좀 하지 말라고, 한국이 뭐가 그렇게 차별이 심하냐면서 나한테 "남편이 말레이시아 재벌이라면서" 깔깔거리던 사람이 생각난다. 내 남편 국적도 틀렸고, 재벌 아니라고 웃으면서 몇 번 말했지만 그 사람은 몇 번이고 다른 사람들 앞에서 "동남아 재벌집에 시집갔잖아 깔깔깔" 을 거푸 반복했다. "외국 나가면 좋잖아. 나도 거기가서 편하게 살고 싶다" 라고도 했다.
어쨌거나, 결국엔 내 성을 물려주지 못하게 됐다. 내 여권 속 띄어쓰기 하나 때문에 외국에서 비자부터 시작해서 은행계좌와 보험 등등 각종 서류를 발급 받을 때마다 문제가 생겼던게 맘에 걸려서였다. 그래도 내 이름은 미들네임으로라도 남았고, 엄마 껌딱지로 잠시나마 싸고 돌다가 어느덧 자라 내 품 밖으로 나돌겠지. 서류에는 없지만 우리 모두 같은 한자의 성씨를 가진 가족이니까, 괜찮아.
그리고 아직 내 아기가 어디에서 어떻게 자랄지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지만, 어디에서 어떤 말을 들어도 부디 담대하게 아이가 받아들이길 기도할 수밖에 없다. 아이가 한국어로 또박또박 말하기 시작하면 사람들이 자기 이름을 부를 때의 조금 다른 그 느낌을 알아차릴 것이다. 그 때 차라리 그게 다 니가 이뻐서 그런거야, 라고 가끔은 농담처럼 말할 수 있는 여유가 생겼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