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아코더 Jul 12. 2021

화장대 진작 팔 걸 그랬네

남편 없었으면 어쩔 뻔


나는 지금까지 '수납 공간이 적어서 고민' 이라는 고민을 수도 없이 들었지만 실제로 수납 공간이 적은 집은 한 곳도 없었다.
곤도 마리에

 


당근 마켓에 10만원에 내놓은 화장대가 좀처럼 팔릴 기미를 보이지 않고 10개월이 흘렀습니다. 쓰지도 않는 오래된 블러셔, 마스크를 쓰게 되어 절반은 남아버린 유통기한 한참 지난 파운데이션. 나에게 맞지 않는 아이크림이 화장대 서랍 속을 얼마많이 차지하던지요.


서랍에는 가진 물건 만큼을 채우는 것이지 서랍만큼 채워야 하는 것은 아니기에 불필요한 것을 끌어 안고 있지 말고 싹 버리기로 했습니다. 비어 있는 서랍장들과, 쳐다보지 않아 먼지가 잔뜩 낀 화장대 거울 속 나를 보며 결단했지요.


'이제 그만, 너를 놓아줄게.'


큰 마음먹고 가격을 단돈 5만원 으로 낮추었습니다. 설마 이래도 안 팔리겠냐는 마음으로요.



올린 후 3시간이 채 안되어 구매를 원하는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사이즈를 재차 꼼꼼히 알려주고 대화로 확인할 것들을 주고 받은 후 거래를 하기로 했지요. 구매자는 용달기사님이 곧 화장대를 실으러 올 거라며 5만원을 게 입금해 주었어요.


그 순간,


'이 무거운 걸 용달기사님 혼자 어떻게 나르려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구매자는 혹시 도와줄 수 있겠냐고 물었고 저는 그러겠다고 답했지요.



남편이 집에 있었냐구요? 아니요. 타이거우즈를 꿈꾸는 그는 골프연습장에서 맹렬히 자기계발(?) 중이었어요. 그런 남편에게 연락을 하려다가 말았습니다.


'까짓  내가 한번 힘 좀 써 보지 뭐!'


불현듯 떠오른 미스에이의 <남자없이 잘 살아> 를 개사해 '남편 없이 잘 살아~'라고 흥얼거리며 신발장 구석에 있던 빨간 목장갑을 꺼내 들었습니다.


I don't need a man I don't need a man (What?)
I don't need a man I don't need a man (진짜)
I don't need a man I don't need a man (정말)
I don't need a man I don't need a man
나는 남자 없이 잘 잘 살아



그때였습니다. 남편이 집에 돌아온 거예요! 마침 용달기사분도 오셨습니다.


'타이밍 무엇.'


유리와 거울에는 뽁뽁이를 붙이고 서랍장은 안 열리게 테이프로 막고 알콜스왑으로 100번정도 닦았습니다.


언제 노래를 불렀냐는 듯 잽싸게 손에 낀 목장갑을 빼고 남편 없이 못 사는 여자로 모드 전환!


결혼 후 8x 키로에서 9x(?)키로로 본의 아니게 벌크업  남편의 도움이 나을테니까요. 한증막 같은 요즘, 더워하며 들어남편을 예상하고 에어컨 풀파워 가동했습니다.


용달기사님과 힘을 합쳐 화장대를 현관까지 그리고 용달차까지 함께 나르는 남편. 저는 화장대 의자만 엘리베이터에 쏙 실어주며 는 척을 했습니다.



집현전 이동


집에 돌아 온 남편은 노동비 5만원을 청구 했습니다. 그의 투쟁이 시작된 것이지요. 그런 남편을 겉으로는 외면했지만 화장대 값으로 5만원을 벌고 남편에게 5만원 주는 것이 내심 아깝진 않았습니다. 기쁨을 주지 않는 요소인 화장대를 팔고 나서 넓고 쾌적한 집현전을 얻었으니까요. 화장대, 진작 팔 걸 그랬지요.


여러분도 설렘을 주는 것들로 공간을 채우며 살고 계신가요?



덧.

용달기사분 오기 전에 혼자 화장대를 슬쩍 들어 보았는데요. 저, '남편없이 잘 살아.' 는 취소 할게요.



내일은 위즈덤 님이 바톤을 이어받습니다. 작가 4인이 쓰는 <남편이라는 세계>에 관심이 간다면 지금 바로 매거진을 구독해 주세요. 

매거진의 이전글 라면 먹고 갈래?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