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 남친이자 현 남편인 그에게 지금까지받은생일 선물을 생각해 봤다. 기억에 남는 건 7년 전 받은 샤넬 카드지갑.그거면 됐다. 지금까지도 매일 지니고 다니는 지갑은 남편이 생일선물로 준 고마움을 날마다 인식하게 해 주니까.
남친이 남편이 된 지금, 그에게 더 이상 물질적인 생일 선물을 받지도, 바라지도 않는다. 그저 생일 아침 정성 가득 들어간 미역국 한 그릇과 축하카드 한 장 이면 샤넬 카드 지갑을 선물 받았을 때만큼 기쁘기 때문이다. 기쁨의 바로미터가 되는 눈물샘을 통해 눈물이 찔끔 나는 걸 보면 말이다. 마음 깊은 곳에서 느낀 감동이 뇌로 전달되고 신경경로를 통해 흘러들어가 눈물샘을 자극한 게 아닐까.
게양대에 태극기가 펄럭이는 아침, 후루룩 쩝쩝 소리에 눈을 떴다. 그와 함께 살며 맞이하는 네 번째 생일날이었다. 생일 한정 방긋웃음을 장착한채 생일 축하한다며 손을 뻗어 일으켜 주는 그의 모닝콜이 기분 좋은 시작을 알렸다.
어젯밤부터 미역국을 준비하느라(?) 부산스러웠던 그를 모른 척하고 잠들었는데 식탁에 미역국이 냉면그릇째 차려 있었다. 조개와 쌀떡이 들어간 미역떡국을 한 술 떴다.
'오! 아침을 번쩍 깨우는 자극적인 맛!'
남편에게 맛의 비결을 물었다.
"마늘이랑 국간장으로만 간 하고 다시다는 여봉생일이라 안 넣었지. 멸치랑 다시마가 다했어."
불 앞에서 멸치를 덖고 다시마를 찬장에서 꺼내 냄비에 투하하는 그의 모습이 그려졌다.
마늘, 국간장, 멸치, 다시마와 미역. 이 5가지 재료만 있으면 생일날 미역국으로가성비 좋은 기쁨을 느낄 수 있다. 마지막 한 술 까지 야무지게 뜨고 떡을 꼭꼭 씹으며 즐거운 대화를 나누던 중에 한 켠에 연핑크색 종이가 보였다.
포스트잇인 줄 알고 옆에 치워 놨는데,
그가 쓴 카드였다. 미역국을 다 먹고 카드를 열었다. 언제 썼냐고 물으니 전날 회사에서 썼다고 한다. 크크... 회사 근처 문구점에 가서 핑크색 생일카드를 샀을 그의 모습을 상상하니 괜히 웃음이 삐져나왔다.
남편이 꼭 우리 아빠랑 닮았다고 느낄 때가 종종 있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필체를 볼 때다. 아빠의 다이어리에 쓴 정갈한 필체를 보면 아빠가 가장 멋져 보이는데, 남편 필체는 아빠 필체를 꼭 닮았다. 남편 필체를 향유하는 마음으로 꼭 생일이나 기념일에 편지를 써달라고 한다. 그래 봐야 500원짜리 작은 카드에 길어봐야 다섯 문장도 채 안 되는 글이 들어가지만 나는 그의 손편지를 꼭꼭 받아서 모은다.
핑크색 카드에 쓴 그의 편지 첫 줄은
'어느덧 삼삼한 나이가 되었네요.'
라고 시작했다. 천천히 그의 글씨를 읽어 내려갔다.
평생 꽃길만 걷게 해 줄 수는 없지만 가시밭길에서는 당신을 업고 가는 남편이 되겠습니다.
회사에서 이런 생각을 했다니. 이 정도면 됐다.
지난겨울, 다리를 다쳐 깁스를 했을 때 남편 등에 업혀 교회를 왔다 갔다 했던 때가 생각났다. 누군가에게 업힌다는 경험이 거의 30년 만이어서업힌 그 순간의 온기를 아직도 기억한다. 업어준다는 말은 사랑 표현의 단계 중에 최상급 일 테다. 그것도 가시밭길에서는 나를 업어준다라니.그냥 말 뿐이어도, 사랑한다는 말보다 더 귀한 문장이었다.
하트 모양의 입체적인 생일케이크도 그려져 있었다. 물론 생일카드의 남은 칸을 채우려는 요량이 틀림없어 보였다. 그의 예술 세계로부터 이런 케이크가 나올리는 없을 것 같아 물어보니 케잌 사진을 보고 따라 그린거라고 한다.2D 아닌 3D 로 그려준 생일 케이크는실물 케이크만큼의 기쁨이었다. 이 기쁨을 오래 간직하고 싶어 냉장고에 잘 보이도록 생일카드를 붙였다.
정성 한 술 들어간 미역국과 핑크색손편지는 줄 서서 산다는 샤넬백도 부럽지 않은 생일 선물이었다. 물론, 미역국과 손편지 그리고 샤넬백의 삼종세트를 받아 본 적은 없어서 그 기쁨의 크기를 정확히 측량할 수는 없겠지만.
남편에게 철통보안 비밀로 쓰고 있는 남편 에세이 <남편이라는 세계> 연재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은데 벌써 4주차까지 달려왔습니다. 4주 동안 들키지 않은 걸 보면 역시 그는 제 브런치에 관심이 없었던 게 틀림없네요.
지난주 글이 많은 사랑을 받고 실은 남편에게 얘기하고 싶어 입이 근질거렸는데요. 마지막 주까지 비밀로 하고 남편 썰을 풀어보겠습니다. 마지막 주 까지 많관부*!
*많관부: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내일은 위즈덤 님이 바톤을 이어받습니다.작가 4인이 쓰는 <남편이라는 세계>에 관심이 간다면 지금 바로 매거진을 구독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