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남자와 결혼하기로 결심한 사건이 있었으니, 때는 바야흐로 2016년 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금요일 저녁, 교통카드를 찍고 지하철역을 나오면서 바지 주머니에 교통카드를 대충 찔러 넣는다. 그러고 나서 주말 내내 교통카드를 찾기 일쑤. 월요일 아침 지하철역에서 지갑을 꺼냈을 때 교통카드가 없는 멘붕의출근길을 맞이하기도 한다.
서울은 벚꽃이 다 지고, 인천은 벚꽃이 지기 시작할 무렵, 남자친구와 늦은 벚꽃 놀이를 하러 벚꽃이 아직 남아 있는 인천 차이나타운에 들렀다.
흐드러지는 벚꽃나무 사이에서 벚꽃 데이트를 즐겼다. 차이나타운에서 유명하다는 백짬뽕 집에 들러 짬뽕 한 그릇 든든히 먹은 다음,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버스를 타고 인천역으로 향했다. 인천역에 도착해 버스에서 내리려던 그 순간, 지갑이 감쪽같이 사라졌다.
인천역, 나무위키
정류장에서 버스문이 닫히고 출발하려는 순간,
"너 지갑 어딨어?"
남자친구가 눈을 크게 뜨고 물었다. 가방 속 지갑은 사라진 후였고 이를 확인한 남자친구는 다급히 정차 버튼을 눌렀다.
'말로만 듣던 소매치기?'
30년 인생 동안 겪어 본 적 없는 소매치기였다. 혼자 해외여행을 다니면서도 지갑을 소매치기 당하는 일이 없었는데 국내에서 소매치기라니.
버스에서 내린 남자친구는 투우사의 물레타를 쫓는 황소처럼 빨갛게 달아 오른 얼굴로 버스에서 내린 소매치기범을 추격했다. 인천역 앞 약 100미터 가량 광속의 추격전. 나는 남자친구가 그렇게 날쌘돌이인 줄 몰랐다.
눈 깜짝할 새 벌어진 일에 아찔했다. (빰빰빰 빠! 바밤~) '경찰청 사람들 BGM'이 흘러나오는듯한 상황에서 나도 따라 냅다 달렸다. 인천역 바로 앞에서 남자친구는 소매치기범의 목덜미를 잡았고 그에게서 지갑을 뺏었다. 통통한 손바닥으로 그의 뺨을 사정없이 갈겨대는데, 더 때리다가는 경찰이 올 것만 같았다. 눈알이 튀어나올 듯이 놀랐다. 정신의 끈을 부여잡으며 그만하라고 남자친구를 진정시켰다. 주먹으로 때렸다면 어쩌면 폭행 사건으로 엮일 만큼 아찔한 상황이었다.
남자친구는 잔뜩 상기된 채로 이만한 게 다행인 줄 알라고 윽박지르며 그 남자를 놓아줬다. 지갑에 현금이라고는 달랑 천원 뿐이라 머쓱했던 나. 투썸 플레*스에 가서 시원한 아메리카노와 달달한 스초생(스트로베리 초콜릿 생크림) 케이크를 먹으며 소박한 지갑을 열어보고 웃었다.
액션영화 속 한 장면을 찍은 듯한 그 날, 곰곰 생각해 보니 그건 명백한 반칙이었다. 낯선 장소, 위기의 상황에서 나를 구해 준 용감한 남자. 반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정녕 평생을 함께 살아가도 될, 듬직한 반려자가, 정의의 사도, 바로 당신인가요?
늦봄에 심쿵 하게 한 사건 이후, 그는 해외 현장 파견 발령을 받았다. 2년간 사우디에 나가야 하는 상황 앞에 그는 나에게 청혼했다. 기다려 달라고. 다녀와서 결혼하자고.
여자는 작고 예쁜 걸 좋아한다는데 나도 그랬다. 소매치기 사건으로 인해 이미 심쿵사*한 나로서는 고민할 이유가 없었다. OK. 승낙이다. 결혼을 약속하고 왜인지 모르게 눈물이 났다.
눈이 시큰거린 그 날은 여느 때보다 뜨거웠던 여름이었다.
남친이 남편이 되고
때로는 투닥거릴 때도 있는데, 그 때 마다 '그래도 이 남자가 내 사람이지. 그 때 내 지갑을 구해 준 정의의 사도였지!' 라며 아련히 추억하게 되는 그 날이 아직도 그 때의 모습이 눈앞에 보이듯 생생하다. 인생은 타이밍이라 하지 않았던가. 어쩌면 남편에게는 정의의 사도로 활약할 수 있는 절호의 타이밍에 소매치기범이 등장한 것일지 모른다.
그런데 남편에게 그 날에 대해 이야기 해 보니 정작, 남편은 아닌가 보다. 그 때 일을 물어보니 기억을 잘 못하는 걸 보면. 이게 바로 동상이몽 인가.
*심쿵사 : 심장이 쿵쾅거려 죽었다 라고 표현할만큼 두근거리는 순간을 비유하는 말
내일은 위즈덤 님이 바톤을 이어받습니다.작가 4인이 쓰는 <남편이라는 세계>에 관심이 간다면 지금 바로 매거진을 구독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