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김없이 찾아오는 연말, 올해는 나의 해 라며 부푼 꿈을 안고 책상 달력을 들고는 그날을 향해 디데이를 세어봅니다. 월급쟁이에게 4에서 5년 주기로 찾아오는 이벤트, 바로 진급이지요. 회사에 다니는 이유가 자기 성취와 국익 실현 나아가 인류 발전이라 말할 수 있는 직장인이 얼마나 있을까요. 입사 후 몇 개월이 채 안되어서 자기소개서가 무색하게도 입사 동기와 포부를 접어두고 임금 인상률과 진급률을 들여다보는 직장인이 되고 맙니다.
이따금 나와 별반 차이가 없어 보이는 동기가 특진을 하기도 하고요. 반면, 옆자리 앉은 송 과장은 3년째 물을 먹었는데 이내 후배가 추월하는 광경을 목격하게 됩니다. 남일 같지 않은 엎치락 뒤치락 속에 올해 드디어 제 차례가 되었습니다. 헛헛한 마음에 텅 빈 회의실에 오도카니 앉아 있어도 보고요. 진급심사 중일 세라 이 세상 퍼포먼스가 아닌 멋들어진 모습을 보여주겠다며 열의에 불타 폭풍 야근을 하기도 합니다. 진급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줄 서기와 사바사바죠. 시점상 인사고과자가 누군지 눈치를 보다가 김 부장이구나! 하는 순간 그분의 생일을 알아내고 생일날 커피 한잔이라도 내어 봅니다.
"부장님, 생신 축하드려요.^-^"
진급 대상자는 나를 포함 5명, 누가 될지는 모르겠으나 꼭 제가 될 것만 같습니다. 나머지 중에서는 뭐... 일단 보고의 왕 김 대리. 출장지에 잘 도착했습니다, 돌아가는 비행기표 잘 끊었습니다, 미팅 후 한인 식당에서 현장 상무님 및 현장 직원들과 회식을 마쳤습니다. 까지... 잠들기 전에도 팀장님 저 이제 잘게요.라고 보고할 것 같은 보고 왕 김 대리도 될 것 같습니다. 호의무사 박 대리는 어떻고요. 팀장 술 취했을 때 끝까지 따라붙어 집까지 모셔다 주던 박 대리는요. 팀장을 모셔주다 못해 집에서 한잔 더 하자는 팀장의 제안에 한잔을 더 마시다가 급기야 팀장님 집 거실 바닥에 대자로 뻗어 잠들고 출근하기 까지 했으니 또 하나의 가족 박 대리까지는 진급하지 않을까 싶네요.
째깍째깍. 진급자 발표일 입니다. 보통 오후 4시에 공지글을 올리고는 퇴근까지 1시간가량 어수선한 공기를 칙칙 뿌리고 사라지는 인사팀 공지 담당자를 기다립니다. 그의 공지글이 게시판에 뜬 순간, 키보드 소리는 요란해집니다. 이름이 가나다순인지 팀명이 가나다순인지 알 수 없는 공고가 뜨고 눈알을 데굴데굴 굴리며 내 이름을 찾습니다. 싸늘한 기운 아래 스크롤을 아무리 내려도 내 이름은 없습니다.
누락이 남기고 간 자리는 마치드럼과 일렉기타가 요란하게 울러 퍼져 그 사이 모르는 옆사람들과도 한 마음 한 뜻으로 휘몰아치게 뛰놀다가 앙코르가 끝나고 모두 떠나버린 락 콘서트장 같습니다. 예상했던 박 대리, 김 대리는 이제 박 과장과 김 과장이 되었습니다. 그들이 과장이 되어 맞이하는 월급 명세서에는 앞에서 두 번째 자리쯤의 숫자가 바뀌어 있을 테지요.
축하 인사를 받는 그들 사이로 나는 어디로 숨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진급발표가 나는 순간까지 더디게 흐르는 시간은 진급발표가 나고 나서 더 느려졌습니다. 퇴근시간인 5시 반 까지 도저히 기다릴 수 없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나섭니다. 왜 이런 날은 한 겨울인데도 햇살이 따사로운지 모르겠습니다. 누굴 위한 햇빛이냐고 햇빛마저 원망하며 십분 이십 분 걷다 보니 퇴근시간이 됩니다. 사무실로 들어가 진급자와 그들을 축하해주는 팀원들 틈에 끼어있기를 못 견딜테니 지하철역으로 곧장 향합니다. 퇴근시간이 되어 퇴근하는 듯 자연스럽게 계단을 내려갑니다. 지하철을 타고 갈 수 있는 한 가장 먼 곳으로 떠나고 싶은 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