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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 먹는 건 15분 컷, 남은 시간에 뭐 하지

by 아코더


나에게 주어진 길고 긴 점심시간은 1시간 30분이다. 30분 덜 쉴 테니 30분 빨리 집에 보내달라 외치고 싶지만, 꼬우면 너가 사장하던가. 하는 답변이 메아리처럼 들려온다.


11시 28분부터 분주해지는 팀원 들의 움직임에 발맞춰 나도 스탠바이 모드를 취한다. 11시 29분 55초. 56... 59초.30분! 땡 되자 마자 사무실 불이 자동 소등되고 우주발사체처럼 의자와 분리되어 튀어나간다.


근처 가까운 제주 고기국수 하는 집에서 가볍게 점심을 먹기로 했다. 북촌에서 제주도식 고기국수라... 크으-

여기가 제주도라고 속으로 되뇐다. 여긴 제주도다. 차창 밖으로 해안가가 보이진 않지만 컵에 그려진 빨간 동백꽃을 보고는 동백꽃 핀 겨울 제주를 떠올린다. 고기국수가 나왔다. 후룩후룩.


옆에 앉은 회사 선배들과 제주도 여행 토크가 시작된다. 너도 나도 한 마디씩 제주도의 추억을 꺼내놓느라 정신없고 그사이 나는 고기국수에 집중해서 신명 나는 면치기를 한다. 지금 여기, 제주 고기국수 거리에 온 거다.


국수라서 그런지 15분 컷으로 끝나는 식사시간이었다. 뜨끈한 국물까지 후루룩 마셔 재끼며 든든히 채웠으니 벼운 산보를 할 힘이 생겼다.


코가 시릴 만큼 추운 건 아니지만 맨다리로 다니기에는 용기가 필요한 계절이다. 그래도 직사광선을 피부에 그대로 맞으며 비타민 D를 합성하는 산보는 정신없는 하루 일과 속 힐링이니 빠뜨릴 수 없다. 려보자 이 시간.


산책을 하든, 서점을 가든, 운동을 하든, 갤러리에 가든, 창덕궁에 가든 누구도 뭐라 할 수 없는 나만의 시간. 때로는 같이, 때로는 혼자 산책을 하며 회사 밖 다른 세계로 접속한다. 동료들과 같이 산책을 한다 해도 대체로 일 이야기를 하지 않는 쪽으로 대화를 이어나간다. 무리 중에서 일 이야기를 많이 하는 사람이 있다면 실례지만 은행 업무를 좀 봐야 한다며 산책로를 홀로 빠져나간다.



봄이면 바람에 흐드러진 벚꽃을,

여름이면 희망온도 18도 에어컨 맛집을,

가을이면 발 밑에 바스락 대는 낙엽을,

겨울이면 따뜻한 유자차를 찾아 발길 닿는 대로 걷는다.


날씨가 좋지 않을 때는 사무실에 들어가 낮잠을 자기도 하고, 불 꺼진 자리에 앉아 희미한 불빛 아래 읽다만 소설책을 꺼내 읽기도 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점심시간에 가장 나를 충만하게 해 주는 건 볕 좋은 날의 산책이다. 그래서 오늘도 제주도에 여행 온 거라 생각하며 낯선 골목을 부러 찾아 나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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