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문구류를 가지고 끄적대는 것을 좋아한다. 손바닥만한 포켓 사이즈 노트 한 권, 책 한 권 그리고 만년필 한 자루만 있으면 주말 내 혼자 보낼 수 있다. 만년필 사각거리는 소리에 집중할 수 있는 조용한 공간이라면 더 좋겠다.
올해 7월에 셀프 생일 선물을 명분으로 처음 산 만년필은 플래티넘 센츄리 EF촉 에메랄드 그린 이다. '생일 쿠폰'과 우리나라에 오직 1개 남은 '한정판'을 이유로 스스로 구매의 당위성을 만들었다. 게다가 100개 한정인데 무려 번호도 내 나이가 적혀 있었기에 보자마자 ‘어머 이건 사야 해.’ 라며 홀라당 구매 했다. 만년필은 일반 펜 보다는 금액이 비싸다. 그만큼 나에게 꼭 맞는 만년필을 들여야겠다는 생각에 고민을 많이 했다.
만년필을 쓸 때는 일반 볼펜이나 연필로 쓸 때와는 다르게 손에 힘이 덜 들어간다. 그래서 계속 쓰게 된다. 또 하나의 장점은 만년필 특유의 필감인데 세필에서 느낄 수 있는 사각거림이 있고 태필에서 느낄 수 있는 부드러운 버터 필감이 있다. 나는 작은 노트에 글씨를 작게 쓰는 편이라 사각거리는 소리가 나면서 가늘게 쓸 수 있는 세필을 선호한다. 고요함 속에서 사각 거리는 소리에 집중하며 쓰다 보면 마음이 편안해진다.
만년필을 즐겨 쓰시는 회사 임원 한 분이 만년필 매니아라는 사실을 익히 알고 있었다. 그 분은 내가 경력직 입사면접을 볼 때 강력한 카리스마를 뿜어내던 팀장님 이었다. 걸죽한 목소리와 상남자 같은 생김새와는 다르게 만년필을 수집하신다는 사실은 참으로 반전이었다. 책상 첫번째 서랍안에 다 합치면 수천만원 가량의 만년필이 들어 있다는 소문도 들었다.
그러던 어느날 오후 3시쯤 혼자서 쉴 겸 사내 무인 도서관에서 책장을 기웃거리다 그 임원분을 만났다.
"너 여기서 일 안하고 뭐하냐?"
라고 하셔서 그야말로 ‘머쓱타드’ 였던 나는 그 분에게 물었다.
"앗(당황하며) 상무님, 혹시 만년필 어떤걸 제일 좋아하시나요?"
자연스럽게 만년필 토크로 이어가고 싶었던 속마음이었다. 그 때 임원분 대답은 저렴하게 구할 수 있는 대중성 만년필 브랜드였고 그 만년필은 이미 임원분 셔츠 포켓에도 꽂혀 있었다.
"20만원 대 14k 촉은 그냥 다 비슷하고, 스틸 촉으로 된 LAMY가 제일 쓰기 무난하던데?"
답변을 듣고 놀랐다. 그 때 바로 만년필 카페에 글을 올렸다. 글의 제목은 이것이었다.
<회사 임원분께 어떤 펜이 제일 좋으냐 여쭈었습니다.>
저희 회사에 높으신 분이 만년필 애호가 라고 들었습니다.
갖고 계신 만년필만 아마 몇천만원 어치라는 이야기를 들은바 있어서...
지나가던 길에 용기내어 여쭤봤지요.
가장 좋은 만년필이 어떤 것이신지요?
그분의 답변에 놀랐습니다.
라미!
"라미가 제일 낫던데~"
라미 펜을 평가 절하 하는 것이 아니라... 고가의 만년필도 많으신데 라미를 꼽으셔서 놀랐습니다.
저를 놀리시려는 것 같지는 않았고 진심이신것 같았습니다.
-삭제-
만년필 구매를 고민중인 라미 펜 한자루 가지고 있는 저로서는....
모쪼록 제가 가지고 있는 라미 펜이 더욱 예뻐보이는 날이었습니다.
설마 이 카페에?
(쭈굴거리는 마음으로 내용을 수정 하였습니당)
-만년필 카페에 내가 쓴 글 중에서-
조회수가 빠르게 올라갔고 댓글이 무진장 달렸다. 카페회원 한 분은 그 정도 만년필 애호가 라면 아마 그 분은 이미 이 카페에서 높은 등급의 회원일거라고 댓글을 달았다. 혹시 카페 회원이어서 글을 보시는 것 아닐까 하고 글의 내용 중 나 같아 보이는 내용을 수정했다. 삭제할까도 고민했지만 이미 엎어진 물, 그냥 내비뒀다.
상무님의 대답 속에는 만년필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쓰는 도구’ 라는 만년필의 본질에 집중한다는 의미가 들어 있는 것이 아니었을까.
사람은 어린시절부터 단조로운 삶을 견디는 능력을 길러야 한다. <성장의 익숙한 삶과 결별하라>
여기서 단조로운 삶을 견디는 능력은 바로 ‘취미’를 의미 한다.
만년필은 이름 그대로 '만년'을 쓰기에 '만년'필 이며 만년필을 쓰는 것은 하나의 취미활동이다. 기록을 하는 취미 중 고급진 취미 랄까. 회사 임원분은 고가의 만년필을 수집하면서도 셔츠포켓에 꽂혀 있던 것은 라미 였다.
본질에 집중해서 만년필 한 자루 들이는 것은 어떨까. 2021년 나를 위한 선물로 만년필을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