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발 달리기, 케냐, 그리고 천천히 달리기
항상 시야 안에 공을 두고, 그 공의 움직임을 주시하며, 또 볼을 드리블하며 뛰었다.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에서 친한 친구들은 거의다 같이 축구를 한 친구들. 학부 공부를 했던 Dickinson College에서도 학교 대표팀 오른쪽 윙으로, 공격 수비를 다 하며 풀밭 위를 뛰어다녔다.
축구공 없는 달리기는 그저 축구 체력을 위한 훈련이었을 뿐이었다.
그러던 나에게, ‘본 투 런'이란 책은 달리기를 진화론적 관점에서, 그리고 맨발 달리기를 경험적 관점에서 궁금하게 했다. 대학교를 막 졸업하고 같이 축구를 할 친구들이 없어서 심심하던 차였는데. 바로 풀밭에 나가 맨발로 달려보았다. 바로 달리기의 맛과 세계에 빠져버렸다.
달리기가 주는 개운함, 살아 있는 기분이 좋아 매일 뛰었다. 그러다가, 결국 욕심이 났고, 나를 증명하는 방편으로 만들어 버렸다:
‘내가 얼마만큼 빠르게 뛰는지 확인하고 싶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금까지 달리기에 관한 지식들을 모두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달리기에 관한 모든 책들을 다 사서 읽었다.
그리고 거의 반쯤 달리기에 미친 상태로, 일주일에 150km 이상을 달리기 시작했다.
‘다른 선수들에 비해 너무도 너무도 늦었다'라는 경각심은 최대한 빨리 엘리트 선수들의 훈련을 따라잡는 것만을 목표로 했다.
더 빠르게, 더 많이! 더 자주! 매일 아침 새벽 5시에 일어나서 거울 앞에 서서 ‘너는 세계 최고의 달리기 선수다'라는 ‘자기 선언'을 외우면서 잠을 깨고, 석촌호수에 나가서 15km를 뛰었다.
그리고 저녁에는 올림픽공원 바깥 큰길을 두 바퀴 뛰어서 10km (하...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중독되었던 것 같다. 다시 저렇게 하라면 절대 할 수 없을 것 같다. 갑작스럽게 훈련양을 늘리는 건 정말 위험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달리기를 경쟁적 관점에서만 파고든 것은 아니었다.
달릴 때, 나는 ‘온전히, 가장 충만히 살아있는 나’였다.
‘러닝 하이'라고 부르는 상태에 들어가면 세상과 나 사이에 분간이 없어지는 걸 느꼈다.
그 어떤 경험보다 황홀하고, 가볍고, 투명한 경험.
그러면서 궁금했다.
‘이 정도밖에 못 뛰는 나도 달리기를 하면서 이 정도의 황홀함과 깊은 경험을 느끼는데, 수년간 훈련한 세계 최고의 선수들은 달리기를 어떻게 경험할까?’
그 질문은 세계 최고 케냐 선수들이 모여 훈련하는 이텐, 케냐로 나를 데려가 버렸다.
4주 동안 풀 마라톤 2시간 15분 주자 Dan과 같이 먹고 자고 지내면서 그들의 삶을 그대로 경험했다.
운도 좋아서, 때마침 2015년 베이징 세계 육상 선수권 대회를 이텐에서 준비하던 케냐 여자&남자 국가대표 마라톤 선수들도 만날 수 있었다. 남자 선수들 훈련에는 감히 꼈다가 1분도 같이 못 달릴 것 같아서, 여자 선수들이 ‘회복 달리기'를 할 때 같이 뛰었다. 예상과는 달리, 세계에서 가장 빠른 선수들은 ‘느리게 달리는 것'의 가치를 더욱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을 배우면서 큰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세계 최고이면서도 너무도 소박하고 겸손한 그들로부터 소중한 삶의 자세를 배웠다.
대학원으로 돌아와 마지막 학기를 다녔다. 무척 바쁜 스케줄이었는데, 달리기 양은 더 늘렸다. 케냐에서 배운 ‘느리게 달리는 것의 가치'를 완전히 잊고, 욕심과 허영심만 가득 찬 상태로 ‘야, 너는 케냐까지 다녀왔다고! 더 빨라져야 해!’ 하며 더 강도 높게 훈련을 높였더니, 몸은 달리기를 먼 외딴섬으로 보내버렸다.
눈도 제대로 못 뜰 정도의 몸살감기와 정신적 소진이 왔다. ‘달리자'라는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엄청난 부담감과 압박감 때문에 지쳐 있었고, 몸이 아프게 함으로써 달리기를 끊어낸 거다. 그렇게 달리기는 나에게 이별을 통보해버렸다.
한국에 돌아와서 일을 하기 시작했다. 아직도 달리기는 나와 이별한 상태.
달리고 싶다
이 생각은 계속 맴돌았다. 그런데 절대 달릴 수 없었다. 달리려는 마음만 먹으면, 머릿속 원숭이가
‘그래?? 그래서 몇 키로 뛸 건데? 어떤 페이스로? 빨리 뛰어야지??’하면서 시끄럽게 떠들어 댔다. 온몸의 힘이 쫘악 빠져나갔다. 그럴 때마다 나에게 달리기는 어떤 의미였는지. 애초에 왜 시작했었는지. 뭐가 좋았는지. 케냐의 선수들은 어떻게 했는지. 질문하고 고민했다. 하지만 답은 안 나왔다.
다시 달려봐야만, 그래야만 알 수 있었다.
어느 날, ‘딱 15분만 밖으로 나가서, 달리기를 다시 경험해보자. 속도는 상관없어. 타이머 7분 30초 맞춰 놓고 어느 방향으로든 갔다가, 울리면 돌아오자.’라는 마음을 먹었다.
그리고 그 마음을 위해, 명상을 했다.
‘빨리 뛸 필요도 없고, 10km 이상을 뛸 필요도 없으니까, 달리기 자체를 경험해보자'
명상은 마음을 지키게 도와주었다. 천천히 다시 달리기를 있는 그대로 경험하면서, 나에게 달리기는 어떤 의미 인지, 왜 지금 뛰고 있는지, 뭐가 좋은지, 느끼기 시작했다. 달리기는 어느새 내 옆에 돌아와 있었다.
다시 달리기 시작하면서, 거리나 속도를 전혀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처음에는 15분만 뛰고 나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집으로 걸어갔다. 정신적으로 쉽지 않았다. 그럴 때마다 케냐 선수들의 ‘회복 달리기'를 생각했다. 페이스나 거리를 위한 것이 아닌, 내 몸을 위한 달리기.
그저 내 몸이 원하는 만큼. 내가 편한 만큼. 더도 말고, 딱 그만큼만.
그러다 보니 다시 30분 달리기가 가능했고, 1시간이 가능해졌다. 멀리 한강을 뛰고 싶으면, 2시간도 재미있게 뛰었다. 그러면서, 케냐에서 배웠던 것들을 글로 정리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렇게 퍼블리와 <케냐 마라토너들은 천천히 달린다>를 썼다 (최근에 글의 일부가 네이버 책문화에 소개되기도).
달리고 싶지 않으면, 그냥 하지 않았다. 쉬었다.
예전 같으면 상상도 못 했을 일이었다. 삶이 달리기의 일부였으니까.
달리기 싫어도 무조건 그 날의 훈련양을 채워야 했고, 일주일에 100km 이상은 기본으로 달려야 했으니까.
하지만 그렇게 했을 때 재미가 없어지고 몸과 마음이 고통받는 것을 경험했기에, 그냥 마음 놓고 쉬웠다.
그러다가, 몸이 근질근질하고 달리고 싶은 날이 오면 달리러 나갔다. 시간이나 속도를 생각하지 않고, 달리는 그 경험 자체에 집중했다. 달리기가 삶의 일부가 되어가고 있었다. 정말로, 정말로 감사했다.
맨발 달리기도 다시 시작했다. 맨발로 달리는 건 신발을 신고 달리는 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즐겁다. 발바닥이 땅에 닿을 때마다 몸이 땅과 춤을 추는 듯한 느낌이다. 달리기는 가장 원초적인 놀이가 된다.
석촌호수, 한강, 서울숲을 맨발로 달리면서 놀다가, 놀이로써의 달리기를 사람들과 함께 하고 싶어 졌다.
#석촌호수명상달리기와 #서울숲맨발달리기 에어비앤비 트립을 만들었다.
처음엔 ‘누가 정말 올까?’ 했다. 그런데 이 두 트립들을 통해서 다양한 연령대와 직업군의 한국에서 지내는 분들과 인연이 만들어졌고, 사우디 아라비아에서 온 가족 8명, 네덜란드에서 왔던 형제 분, 미국, 홍콩, 싱가 포어 등에서 온 게스트 분들과도 달리기를 통해 친구가 되었다. 게스트분들은 지금까지 총 40개가 넘는 후기를 남겼다.
그중, 아래 정은님의 후기는 평생 잊지 못할 것 같다
"저는 원래 달리기를 싫어하는 사람인데도 사람들이랑 같이 하니까 너무 재밌고 뭔가... 나도 잘 뛸 수 있고 즐길 수 있을 거라는 자신감이 생겼던 것 같아요. 저는 달리기에 정말 취미가 없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프로그램 통해서 달리기에 대한 관점이 달라졌어요. 무조건 오래, 많이, 빨리 뛰어야 한다는 생각에서 내 호흡에 집중하고, 천천히, 힘을 빼고 가볍게 뛰어도 된다는 것을 배웠어요. 긴 인생을 내다봤을 때 이건 정말 돈 주고 사기 어려운 깨달음이라고 생각해요. 달리기에 막연한 관심은 있지만 그동안은 달리기가 너무 힘들고 힘들고 버텨야만 하는 운동이라고 생각되어 섣불리 시작하지 않으셨던 분들에게 이 프로그램 정말 강추합니다."
그렇게 에어비앤비 트립 하는 것을 낙으로 지내던 어느 주말. 학교 후배랑 압구정 주변에서 브런치를 먹던 도중에, 후배가 갑자기 룰루레몬을 아냐고 물었다.
‘요가 옷 브랜드 아니야?’
‘응, 그런데 거기서 요가 클래스도 하고, 달리기 클래스도 하더라고. 오빠 가서 한번 봐봐~’
뭐, 가서 이야기해봐서 나쁠 게 있겠어? 하면서 룰루레몬 청담점에 갔다. 정확히 어떤 이야기를 했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달리기를 좋아하고, 여기서 달리기 클래스를 연다고 들었는데 만약 리드하는 사람이 필요하시면 같이 할 수 있으면 좋겠어요' 같은 식으로 말했을 것 같다.
그렇게 룰루레몬과의 인연이 맺어졌다. 이 소중한 인연 덕분에 더 많은 사람들과 명상 달리기를 나눌 수 있었고, 자기 분야에 최선을 다하는 멋진 분들 - 존경하는 여러 요가 선생님들, 한국 최고의 아이언맨 오영환 코치님, 자신의 삶과 일을 사랑하고 온 마음을 다하는 룰루레몬 분들 - 을 만날 수 있었다. 전혀 생각지도 못한, 너무나도 감사한 선물이었다.
추운 날씨가 시작되어서, 이미 예약이 되어 있는 서울숲 맨발 달리기 12/2,9 두 날만을 제외하고는, 에어비앤비 트립들은 문을 닫았다. 룰루레몬도 겨울에는 야외 클래스는 지양한다고 해서, 실내 클래스 몇 개를 제외하고는 달리기 클래스는 없을 것 같다.
올 한 해 동안 많은 게스트 분들과 달리기를 같이 하고 나누면서, 더 깊게 공유하고 이야기해보고, 전해드리고 싶은 이야기가 많이 있었다. 특히, 게스트 분들이 지금까지 궁금해하거나 ‘배우고 싶은 것'이라고 하면서 공유해 주신 것들 중에 번번이 눈에 보이는 것들에 대해서 더 깊게 이야기하고 싶었다.
그래서 지금까지 게스트 분들과 직접 같이 이야기하고 달리면서 달리기를 나누었다면, 이번 겨울 동안은 글과 비디오로 달리기에 대해 나누고 싶다.
아래는 지금 생각하고 있는 글과 비디오의 주제들
<나에게 맞는 달리기 자세: 나 지금 좋은 자세로 뛰고 있을까?>
<포어 풋 101: 킵쵸게에 의해 화제가 된 포어 풋을 할 수 있는 쉬운 방법>
<천천히 달려도 괜찮아요: 세계 최고 케냐 선수들이 천천히 달리는 이유>
<하프 마라톤 한번 뛰어 볼까요? 내 생애 첫 하프 마라톤 목표 설정과 계획 세워보기>
<트레일 러닝 한번 뛰어 볼까요? 내 생애 첫 트레일 러닝 레이스 목표 설정과 계획 세워보기>
<트레드밀 위에서는 도대체 어떻게 뛰지? 트레디밀위에서 달리기 101>
<오늘은 얼마나, 어느 속도로 뛰어야 할까: 내 목표에 맞는 훈련 일지 짜기>
<러너의 몸: 5년 동안 달리기를 하면서 발견한 러너의 몸을 위한 6가지 동작>
<러너의 마음가짐: Haraka haraka haina baraka>
<지금도 '습습후후'하나요? 달릴 때 덜 힘든 호흡하는 방법>
<달리기 전과 후에는 다른 준비운동/스트레칭해야 해요>
<어디서 달려요? 서울에서 달리기 좋은 곳들>
<심심해서 어떻게 달려요? 달릴 때 듣는 음악>
<10km 신기록 달성해 봅시다>
<5km 신기록 달성해 봅시다>
<'저는 유연성이 정말 없어서 요가는 정말 아닌데요’: 러닝과 요가>
... 등...
(가장 먼저 읽고 싶은 글이나, 다른 궁금한 점이 있으면 댓글로 달아주시길 부탁드립니다 ��)
이렇게 5년 동안의 달리기 여정을 글로 풀어 보니, 달리기 하나에 대해 뭐 이렇게 심각하게 생각하고 행동으로 옮겨 왔는지도 싶다. 그런데 답은 결국, 또 달리러 나가는 데에서 찾아지니까. 계속 달리게 되는 거 같다. 그리고 계속, 건강히 달리기 위해, 속도나 거리, 경쟁이 아닌, 달리기 그 자체에 더 집중하고 싶어 지는 것 같다.
5년간 달리기 여정 끝.
p.s.
저의 5년 달리기 여정을 가장 짧게 풀어 보려 했는데, 글이 엄청 길어졌네요.
쭈욱 읽어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달리기에 대한 질문이 있으시면 댓글에, 혹은 인스타로 물어봐 주세요.
저가 모르는 건 모른다고 하고, 도움을 드릴 수 있는 부분이면, 최대한 도움이 될게요.
감사합니다.
아래는 글에 소개된 퍼블리 글, 에어비앤비 트립, 그리고 이번 주 토요일 (12/1)에 진행하는 나눔 달리기에 관한 링크들이에요. 나눔달리기번개는 좋은 취지로 진행하는 것이니 한번 꼭 봐주세요 :)
<케냐 마라토너들은 천천히 뛴다> 읽기 (퍼블리 링크)
올해 마지막 서울숲맨발달리기 참가하기 (에어비앤비 링크)
#나눔맨발달리기번개 참가하기 (구글폼 링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