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sten to your body
『상태를 안무하다』
나는 어느 날 작업실 바닥에 신발을 벗은 채 앉아 한참을 움직이지 못한 적이 있다. 음악은 이미 꺼져 있었고, 몸은 준비도 휴식도 아닌 애매한 상태로 멈춰 있었다. 막 연습을 시작하려던 순간이었는데, 이상하게도 아무 움직임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날의 몸은 무겁지도, 아프지도 않았지만 어딘가에서 이미 한 번 늦은 것처럼 느껴졌다.
나는 오랫동안 이런 상태를 실패라고 불러왔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서야 그것은 실패라기보다 아직 나를 따라오지 못한 몸, 아직 도착하지 않은 감각에 가까웠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무렵의 나는 이미 여러 작품을 만들고 있었고, 겉으로 보기에는 안무가로서 크게 흔들리지 않는 사람처럼 보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작업이 끝날 때마다 이상한 공백이 남았다. 작품은 분명 존재했지만, 그 안에서 나는 늘 한 발짝 비켜서 있었다. 마치 잘 다려진 재킷을 빌려 입고 거울 앞에 서 있는 사람처럼, 핏은 맞는데 체온은 남의 것이었다.
“요즘 안무 같네요.”라는 말을 들을 때면 나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이 칭찬인지, 그저 익숙한 언어의 관성인지는 굳이 구분하지 않았다. 하지만 혼자가 되면 몸은 여전히 배고팠다. 텅 빈 냉장고 문을 열었을 때처럼, 분명 무언가를 만들었는데 먹은 것 같지 않은 상태였다. 나는 안무가가 된다는 것이 자기 이야기를 하게 되는 일이라고 막연히 믿고 있었지만, 실제로 내가 하고 있던 일은 사람들이 기대하는 이야기를 조용히 계산하는 일이었다. 이 움직임은 너무 개인적이지 않은지, 이 장면은 이해하기 쉬운지, 이 선택이 나를 조금 더 먼 곳으로 데려다줄 수 있는지 묻는 사이에서 나는 서서히, 그러나 분명하게 지워지고 있었다. 그래서 작품은 남았지만, 나는 남지 않았다.
나에게는 아주 따뜻하고 그래서 더 무섭기도 한 선생님이 한 분 계신다. 부토를 베이스로 춤을 시작해 지금은 일본 컨템퍼러리 댄스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존재 중 한 사람인 야마다 세츠코 선생님이다. 그녀를 오래 지켜보며 나는 종종 이 사람에게 춤은 직업도, 장르도, 표현도 아니라 그저 살아 있는 방식이라는 생각을 했다. 우리의 인연은 20여 년 전, 내 모교에서 열린 워크숍을 계기로 시작되었다. 그때의 나는 지금보다 훨씬 젊었고, 지금보다 훨씬 확신이 많았다.
이후 우리는 일본과 한국을 오가며 자주 만났고, 서로의 공연을 보기 위해 비행기를 타는 일을 전혀 특별하게 여기지 않을 만큼 가까워졌다. 특히 선생님은 언제나 나보다 더 적극적이었다. 어디서든 상황을 만들어서라도 내 공연을 보러 왔고, 공연이 끝나면 늘 밤늦게까지 작품과 춤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때 오갔던 말들은 그 자리에서 모두 이해되지 않았다. 마치 몸 어딘가에 조용히 묻혀 들어가 오랫동안 잠들어 있는 것처럼 남아 있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내가 어떤 벽 앞에 서거나 설명할 수 없는 상태를 마주할 때마다, 그 말들은 어디선가 다시 나타났다. 아직도 내 몸 안 어딘가에는 그렇게 숨어 있다가 언젠가 다시 모습을 드러낼 말들이 남아 있다.
선생님은 내 작품을 여러 번 보고 난 뒤 어느 날 이렇게 말했다. “김성용의 작품은 바뀌고, 변화하는데 그 작품 안에서 김성용이 보이지 않는다.” 그 말을 들었을 때 나는 이해되지도 않았고, 당황했고, 무엇보다 듣기 싫었다. 내가 계획을 세우고 모든 순간을 결정하고 모든 선택을 책임지며 만든 작품인데, 그 안에 내가 보이지 않는다니. 그 말은 조언이라기보다 질문이었고, 그 질문은 거의 10년 가까이 사라지지 않았다. 나를 괴롭혔고, 도망치고 싶게 만들었으며, 결국 끝내 생각하게 했다. 마치 끈질긴 악마 같은 천사처럼.
그 이후로 나는 ‘나만의 모습을 찾는다’는 말을 목표처럼 생각하지 않게 되었다. 그것은 무언가를 발견하는 일이 아니라, 내 안에서 계속 일어나는 모든 상태들을 직시하고 받아들이고 들어주며 그때그때 답해보는, 끝이 보이지 않는 시간에 가까웠다. 이 시간들은 어느 날 갑자기 시작된 것이 아니라 내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 이미 내 안에서 조용히 시작되고 있었던 것 같다. 나는 그 시간을 쫓아가기도 했고, 끌려다니기도 하며 살아오게 되었다. 어떤 날은 내가 선택하고 있다는 감각이 분명했고, 또 어떤 날은 내가 아닌 어떤 흐름에 몸을 맡긴 채 가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 시간들을 통과하면서 신기하게도 나와 비슷한 상태를 지나온 다른 장르의 예술가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들의 작품과 삶의 이야기를 통해 이해가 되기도 했고, 상상이 되기도 했으며, 이미 본 적 있는 풍경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들의 작품 안에서는 결과보다 먼저 망설였던 시간, 확신하지 못했던 상태, 흔들리며 통과해 온 과정이 자연스럽게 보였다. 그때 나는 알았다. 나만의 것을 만든다는 것은 완전히 새로운 무언가를 발명하는 일이 아니라, 이미 내 안에서 시작된 이 시간들을 끝까지 따라가 보는 일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그 이후로 나는 작업을 의미에서 시작하지 않게 되었다. 대신 끌림에서 시작했다. 왜 이 움직임인지 처음부터 알지 못해도 괜찮다고, 몸이 먼저 반응하는 지점을 한 번 믿어보기로 했다. 그 과정 속에서 나는 이것이 춤을 만드는 일이 아니라, 하나의 결과를 향해 가는 동안 수없이 바뀌는 상태들을 견디고 통과하는 일이라는 것을 조금씩 알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늘 변하는 몸의 컨디션을 방해물이 아니라 출발점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이 태도는 ‘Listen to Your Body’라는 짧은 문장으로 남았고, process init이라는 나의 안무 메서드로 이어졌다. process init은 처음부터 누군가에게 설명하기 위한 체계가 아니었다. 그것은 작업 안에서 나를 잃지 않기 위한 아주 개인적인 기준이었다. 완성보다 상태에서 시작하는 방식, 의미보다 반응에서 출발하는 태도, 그리고 “지금 여기까지 오기까지 무엇이 지나왔는가”를 계속해서 묻는 방식. 이 메서드는 내가 약해졌을 때 태어났고, 그래서 더 오래 남았다.
무용수들과 함께 작업하며 점점 형태를 갖추었지만, 그 시작점에는 언제나 아주 사적인 감정이 있었다. 잘 해내지 못할 것 같다는 예감, 기대에 미치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그래도 오늘은 이 몸으로만 갈 수밖에 없다는 체념. 그래서 나는 그들을 무용수라기보다 프로세서, 그리고 코-크리에이터라 부른다. 우리는 결과를 맞추기보다 과정을 함께 통과한다. 각자의 아이덴티티를 가지고 변화에 순응하라는 이 문장은, 지침이기 이전에 내가 가장 듣고 싶었던 말이기도 했다.
그래서 이제 내 작품에는 명확한 메시지가 없다. 그것은 포기가 아니라 관객에게도 자기만의 감각과 질문을 돌려주고 싶다는 뜻이다. 지금 보이는 장면이 전부라고 생각하지 않아도 괜찮고, 이 움직임 이전에 있었을 망설임과 선택들을 잠시 상상해도 괜찮다. 그렇게 바라본다면 이 작품은 조금 더 오래, 조금 더 깊게 머무를 수 있을지도 모른다. 말하지 않지만 숨기지 않고, 정리하지 않지만 방치하지 않는 그 어딘가에서 나는 비로소 작품 안에 남아 있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이제 나를 믿는다. 그것은 확신이라기보다, 이 몸이 지나온 상태들을 더 이상 부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조용한 동의에 가깝다. 조금 느리고, 조금 불안해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