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태를 안무하다 - 관찰

엄마와 낯선 아들

by 김성용

나는 종종 움직임은 관찰에서 시작된다고 말해왔다. 오래전부터 습관처럼 입에 붙은 말이지만, 곰곰이 돌아보면 그것은 신념이라기보다 매번 안무를 시작할 때마다 몸이 먼저 선택해 온 방식에 가깝다. 작업실에 들어서면 무엇을 해야 할지 생각하기도 전에, 나는 이미 보고 있다. 그리고 그 ‘본다’는 행위는 결코 중립적이지 않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장면을 동일하게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흐르고 흩어지는 수많은 순간들 중 어디에 머물지를 결정하는 일에 가깝다.


시선이 머무는 선택은 곧 하나의 흐름을 만들고, 그 흐름은 반복되며 몸 안에 축적된다. 나는 그 과정 속에서 유독 반응하게 되는 어떤 기호들을 차곡차곡 쌓아간다. 그것들은 완성된 동작이나 명확한 형태로 남기보다는, 과정의 어딘가에 머문 채 다음 선택을 조용히 준비한다. 그래서인지 작업을 하며 순간순간 결정을 내릴 수 있는 것도, 사실은 이미 수없이 보고, 머물고, 흘려보내며 쌓아온 관찰의 시간이 몸에 배어 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 믿음이 단순한 개념이 아니라 몸의 기억으로 각인된 계기가 있다. 한때 세간의 주목을 받던 ‘솔로이스트’ 프로젝트를 통해, 나는 취리히 오페라하우스에 상주하던 취리히 오페라 컨템퍼러리 댄스 컴퍼니의 예술감독이었던 안무가 Gisela Rocha와 함께 작업하게 되었다. 국내외의 안무가와 솔로 무용수를 매칭해 새로운 작품을 만드는 그 프로젝트에서, 나는 그녀가 있는 취리히의 집에 머물며 만남의 첫 순간부터 공연이 완성되기까지 전 과정을 함께 통과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출발은 아무것도 정해지지 않은 상태였다. 취리히로 가기 전 우리는 이메일을 여러 차례 주고받았지만, 작품에 대한 의견은 끝내 좁혀지지 않았다. 그녀는 “우리의 이야기를 하자”는 말만 남겼고, 나는 그 말이 약속인지 회피인지 알 수 없는 상태로 불안한 마음을 안고 비행기에 올랐다. 돌이켜보면, 이미 그때부터 작업은 시작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결과가 아닌 상태 속으로 들어가는 연습처럼.


우리는 사실 그 이전에 한 번 스쳐 지나간 인연이었다. 수개월 전 그녀가 서울을 방문했을 때, 한국의 안무가들을 간단히 소개하는 일을 도운 적이 있었고, 그 짧은 만남이 이렇게 다시 이어질 줄은 몰랐다. 우연처럼 보였던 그 연결이, 취리히에서 함께 작업을 하며 점점 필연처럼 느껴졌던 이유는 아마도 우리가 같은 방식으로 ‘보는 사람’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취리히에서의 첫 작업 날, 그녀는 내게 35개의 질문을 건넸다. 그것들은 동작이나 작업에 관한 질문이 아니라, 놀랄 만큼 개인적인 것들이었다. 그중 하나가 아직도 선명하다.

“엄마가 너를 자주 쓰다듬어 줬었니?”


나는 그 질문 앞에서 한동안 말을 잃었다. 쓰다듬는 장면을 떠올리려 애썼지만, 이상하게도 그 장면은 좀처럼 떠오르지 않았다. 대신 한 번도 의식적으로 꺼내본 적 없던 엄마의 모습들이 하나둘 떠올랐다. ‘우리의 엄마’가 아니라, ‘나의 엄마’로서의 얼굴들. 나는 그 질문 안에서, 그리고 그 질문이 허락한 시간 안에서, 취리히에 있었다.


다음 날, Gisela는 집 뒤에 있는 산으로 함께 트래킹을 가자고 했다. 아침을 간단히 먹고 집을 나서기 직전, 그녀는 하나의 규칙을 제안했다. 손을 잡고 걷되, 말을 하지 말 것. 장난 같기도 한 그 제안에 우리는 그대로 따르기 시작했다. 말을 하지 않자, 눈에 들어오는 것들이 이전보다 훨씬 선명해졌다. 의미를 붙이지 않아도, 설명하지 않아도, 장면들은 저마다의 밀도로 다가왔다.


손을 잡고 있었기에 우리는 같은 속도로 걷게 되었고, 같은 방향을 보게 되었다. 어떤 순간에는 약속이라도 한 듯 같은 대상 앞에서 멈춰 섰다. 작은 나뭇잎의 흔들림, 빛이 닿는 방식, 물이 흐르다 잠시 고이는 지점. 우리는 그것들을 전체가 아닌, 아주 작은 부분부터 바라보았다. 두 시간이 가까워졌을 무렵, 마지막 언덕을 내려오며 우리는 다시 말을 하기 시작했고, 자연스럽게 손을 놓았다.


그제야 알게 되었다. 무심코 지나칠 수 있었던 모든 것들이 이미 내 안으로 들어와 나를 깨우고 있었다는 것을. 특히 기억에 남는 장면이 있다. 작은 계곡에서 우리는 한동안 멈춰 섰다. 큰 돌 아래 작은 돌 하나가 있었는데, 큰 돌이 가려주고 있어 작은 돌은 물에 닿지 않아 하얗게 말라 있었다. 우리는 그 두 돌을 오래 바라보았다. 그 순간, 전날의 질문이 다시 떠올랐다.

“엄마가 너를 쓰다듬어 줬었니.”


그 두 돌은 쓰다듬음이라는 행위를 전혀 다른 형상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직접적인 접촉이 아니라, 둘러싸는 것. 보호하는 것. 주변의 조건을 만들어주는 것. 나는 그때 처음으로 쓰다듬는다는 감각을 상태로 이해하게 되었다.


그렇게 관찰에서 시작된 감각들은 이후 10일간의 밀도 높은 리허설을 통해 하나의 흐름으로 이어졌고, 우리는 약 35분 분량의 작품 〈엄마와 낯선 아들〉을 완성했다. 그 과정에서 나는 확신하게 되었다. 무용수는 결코 아무 이유 없이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을. 아주 미세한 자극이라도, 몸이 반응할 만한 무엇인가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을.


그래서 지금도 리허설을 시작할 때 나는 동작보다 먼저, 요즘 내가 무엇을 보고 있는지를 이야기한다. 어디에서 시선이 오래 머물렀는지, 왜 어떤 장면은 쉽게 지나치지 못했는지, 그 선택이 어떤 흐름을 만들었는지를. 그 이야기들이 누군가에게는 움직임을 시작하게 하는 아주 사소한 계기가 되기를 바라면서. 그래서 나는 무용수들을 결과를 재현하는 존재가 아니라, 각자의 과정을 통과하고 처리하는 ‘프로세서’라고 부른다.


어떤 대상을 관찰하기 시작하면, 나는 여전히 전체를 보려 하지 않는다. 이상하게 마음에 걸리는 아주 작은 부분에 시선이 멈춘다. 손의 방향, 말을 고르다 멈춘 시간, 움직임 뒤에 남은 짧은 망설임. 그것들은 형태라기보다 흐름이 잠시 드러난 지점이다. 그리고 나는 그 지점에 머무는 법을, 취리히에서 배웠다.


작업이 어느 정도 진행되면 시선의 방식이 달라지는 순간이 온다. 조각들이 흐름이 되고, 선택들이 방향을 만들며, 모든 요소가 하나의 덩어리처럼 응집된다. 나는 이 시점을 결정이라기보다, 하나가 되기 직전의 상태로 기억한다.


그리고 작업의 끝에 다다르면, 마침내 찾게 된다. 완성된 형태가 아니라, 확신에 가까운 상태를. 그것은 잠시 모습을 드러냈다가 다시 흐름 속으로 들어가지만, 그 이후로는 더 이상 헤매지 않는다. 몸이 이미 그 방향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붙잡기보다 신뢰하며 따른다. 완성된 표현을 목표로 하기보다, 진실한 과정에 집중하려 한다. 드라마는 언제나 정직한 움직임 속에서, 그리고 그보다 먼저 정직한 관찰 속에서 자연스럽게 발생한다는 것을, 나는 그때 이후로 더 깊이 믿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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