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감당하는 시간
마크 로스코와 잭슨 폴락을 함께 떠올리게 된 이유는, 그들이 전혀 다른 방식으로 같은 질문을 던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폴락은 몸을 던졌다. 흔들림과 망설임, 통제되지 않은 순간들까지도 그대로 화면 위에 남겼다. 그의 작업에서 중요한 것은 결과보다 그가 통과한 상태였고, 붓질이 아니라 몸이 지나간 흔적이었다. 반면 로스코는 가라앉았다. 가까이 다가가야만 보이는 색, 오래 머물러야만 감지되는 감정 속에서 그는 자신의 내면 상태를 드러냈다. 설명보다 체류를 요구하는 태도였다.
내가 이 두 화가에게서 나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 출발점은 작품이 아니라 인터뷰였다. 믿기 어려울 만큼 솔직한 그들의 답변 속에는, 끊임없이 자신을 자각하면서도 끝내 스스로를 신뢰하려는 태도가 담겨 있었다. 미술의 영역에서 역사에 남을 만한 작업을 남긴 예술가들은 하나같이 그러했다. 그들은 자신을 미화하지 않았고, 동시에 자신을 의심만 하지도 않았다. 의심과 신뢰를 동시에 끌어안은 채, 자기 상태를 끝까지 따라가는 사람들이었다.
그 솔직함을 바라보며 나는 자연스럽게 내가 몸담고 있는 무용의 환경을 떠올리게 되었다. 무용가들은 종종 지적 허영심으로 가득한 주변의 시선, 영향, 그리고 감시 속에서 작업한다. 설명해야 하고, 설득해야 하며, 해석 가능해야 한다는 요구 속에서 자신을 자신에게서 밀어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나 역시 그 안에 있었다. 잘 보이기 위해, 이해되기 위해, 의미 있어 보이기 위해 나의 상태를 먼저 밀어내고 있었다.
이 대비는 나에게 중요한 질문을 남겼다. 왜 어떤 예술가들은 그렇게 솔직할 수 있었을까. 그리고 왜 우리는 그 솔직함을 위험한 것으로 취급해 왔을까. 그 답은 점점 분명해졌다. 그들의 고유함은 특별한 결과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자신을 직시하는 진실된 과정에서 형성되었다는 것. 끊임없이 스스로를 자각하면서도, 그 과정을 끝까지 신뢰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렇게 형성된 질서는 하나의 우주처럼 느껴졌고, 그 안에서 발생하는 긴장과 밀도는 연출이 아니라 과정이 남긴 흔적, 다시 말해 진실된 과정 안에서 자연스럽게 발생한 드라마였다.
이 지점에서 나는 확신에 가까운 감각을 얻었다. 폴락과 로스코의 태도는 내가 ‘process init’이라 부르는 나의 안무 메서드와 본질적으로 닮아 있었다. process init은 무엇을 보여줄 것인가 보다 지금 어떤 상태에 있는가에서 출발한다. 의미를 미리 설계하지 않고, 결과를 예측하지 않으며, 몸이 먼저 반응하는 지점을 신뢰하는 방식이다. 주변의 해석과 기대가 아니라, 지금의 몸이 통과하고 있는 상태를 기준으로 삼는다.
폴락이 캔버스 위에 몸의 흔적을 남겼듯, process init은 무용수의 몸이 지나온 상태를 기록한다. 로스코가 색을 통해 머무는 시간을 만들었듯, 이 메서드는 빠른 결론을 유보하고 체류할 수 있는 시간을 허락한다. 이는 자신을 몰아붙이는 방식이 아니라, 자신을 끝까지 따라가 보려는 태도에 가깝다.
이 메서드는 강함에서 태어난 것이 아니다. 잘 해내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예감, 기대에 미치지 못할 수 있다는 두려움, 그래도 오늘은 이 몸으로 갈 수밖에 없다는 체념 속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바로 그 지점에서 작업은 가장 솔직해졌고, 드라마는 연출이 아니라 과정의 결과로 나타났다. 진실된 과정 안에서 드라마가 나온다는 사실을, 나는 작업을 통해 체감하게 되었다.
두 화가의 모습을 통해 나는 나의 상태와, 내가 선택한 방법론 process init에 대한 믿음과 신뢰를 갖게 되었다. 그것은 확신이라기보다, 흔들려도 괜찮다는 허락에 가까웠다. 외부의 시선에 나를 내몰지 않고, 지금의 상태를 기준으로 살아도 된다는 조용한 동의였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살아가고 있다. 무엇이 될 것인가 보다, 지금 어떻게 통과하고 있는가를 묻는다. 설명보다 경험을, 해석보다 체류를 선택한다. 폴락처럼 흔들리며 기록하고, 로스코처럼 머무르며 견딘다. 안무란 나를 증명하는 기술이 아니라, 내가 통과하는 시간을 정직하게 감당하는 일이라는 믿음 속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