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The Surplus Square Dec 31. 2019

'랩 걸(Lab Girl)'을 읽다

매우 특이한 여성 과학자의 사적인, 특별한 이야기

요약

1. 여성 과학자, 호프 자런의 자전적 이야기

2. 과학은 무엇인가? 과학자는 누구인가?

 - 과학은 특정 대상의 근원적 원리를 밝히기 위해, 깊게 들어가는 것을 지향하는 학문이다. 과학자는 과학을 직업으로 하는 사람을 말하며, 그 무언가에 몰입하고, 때로는 몰입 대상이 삶의 목적이 된다.

 - 과학자로서의 삶, 생활인으로서 삶의 균형이 중요하다는 이야기를 하지만 좋은 과학자가 된다는 것은 과학 이외의 삶은 포기한다는 사실의미한다. 누군가의 강요가 아닌 그럴 수밖에 없는 선택이다.  

 - '과학' 이외의 영역에서는 매우 부족한 사람이다. 무언가에 몰입하고, 엄청난 시간을 투입한다는 것은 생활인으로 해야 하는 다른 의무들을 무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저자인 호프 자런의 주변에는 그녀가 과학을 하기 위해 소속 대학을 바꾸면 어디서든 직업을 구할 수 있는 남편과 그녀가 가는 곳이라면 연구를 돕기 위해 따라나서는 연구 동반자 빌이 있다.


추천 이유는?

1. 호프 자런이 뛰어난 작가이다. 놀라운 글솜씨로 매우 사적인 이야기를 유쾌하게 풀어간다.

2. 과학자의 삶을 세밀하게 들여다볼 수 있다. 물론, 보편적 과학자의 삶이 아닌 호프 자런의 삶이지만, 그럼에도 하고 싶어 하는 일에 미친 사람들의 삶을 살펴볼 수 있다.




과학이 직업인 사람, 과학자는 어떤 사람일까?


동탄역(SRT)에는 스마트도서관이 있다. 고속열차를 이용하는 사람들이 동탄역을 오가며 책을 빌릴 수 있는 커다란 자판기가 있다. 동탄에 살면서, 지방 출장이 빈번한 나에게는 완벽한 시설이다. 키오스크의 화면을 눌러, 어떤 책을 읽을지 잠시 동안 고민했고 랩걸을 선택했다. 그리고 이 책은 2019년, 내가 읽은 100여 권 중 최고의 책이 되었다. (화성시민이라면, 주변의 화성 시내 도서관에 방문해서 회원으로 가입하고, 리브로피아라는 앱을 다운로드하면, 동탄역 내 스마트도서관을 이용할 수 있다)


랩걸. 주변 사람에게 이야기하면, 랩 하는 여자(Rap Girl)를 쉽게 떠오를 듯 싶다. 힙합에서 여자는 더 이상 신기한 존재가 아니다. 우리나라에서 남녀 불문하고 가장 랩 잘하는 사람에는 윤미래 씨가 포함되기도 하니깐 말이다. 힙합의 역사가 50년도 지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고려한다면 랩 하는 여자가 아주 많다는 사실은 특이한 특징일지도 모르겠다. 과학은 힙합보다 훨씬 오래된 역사를 자랑하고 있지만(가령, 고대 그리스라든지, 이집트 문명이라든지...) 과학 하는 여자는 랩걸의 저자 호프 자런이 학생이었던 20여 년 전이나 지금이나 많지 않다. 그래서 랩걸의 이야기는 의미가 크다.


물론, 이 책은 최고의 책이라고 꼽는 데는 여성 과학자를 제대로 다뤘기 때문이 아니다. 남성 과학자가 자신의 이야기를 이 정도로 쓰고 그 제목을 <랩보이(lab boy)>로 정했다 해도 아마 최고의 책이라 말했을 것 같다. 책의 내용은 '어떻게 과학에 관심을 가졌고', '과학자가 되었는지', '관심 가지는 연구 분야는 무엇이고', '어떻게 연구하는지', '평생의 조력자인 연구 파트너는 누구인지' 등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저자가 그 내용을 매우 유쾌하면서도 진솔하게 작성한 점이 마음에 들었다.  각설하고, 책을 살펴 보도록 하겠다.



풍부한 어휘와 재밌는 문장으로 가득 차 있는 책


사람들은 바다를 좋아한다. 사람들은 나에게 왜 바다를 연구하지 않느냐고 묻는다. 내가 하와이에 살기 때문에 더 그럴 것이다. 나는 그런 이들에게 바다를 연구하지 않는 이유는 그곳이 외롭고 텅 비었기 때문이라고 대답하곤 한다. 육지에는 바다보다 600배나 되는 생명체가 살고 있다. 사실 그 격차는 주로 식물로 인해 생겨난다. 바다의 평균적인 식물은 약 20일 정도 사는 단세포 생물이다. 육지의 평균적인 식물은 100년 넘게 사는 2톤짜리 나무다. 바다에 사는 식물과 동물의 질량비는 4에 가깝지만, 육지에서는 그 비가 1,000에 달한다. 식물의 개체 수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많다. 미국 서부의 보호림 안에만도 800억 그루의 나무가 산다. 미국 내 나무와 사람의 비는 200을 훨씬 넘는다. 사람들은 보통 식물에 둘러싸여 살고 있지만, 그것을 잘 보지 못한 식물 말고 다른 것이 보이지 않는다.


프롤로그, 책을 열자마자 만나는 글자들의 조합이다. 느낌이 어떤가? 킁킁. 덕후의 냄새?


무엇이 보이는지? 아마도 사람들이 만들어놓은 것들이 보일 것이다. 거기에는 다른 사람들, 자동차, 건물, 인도 등이 있을 수 있겠다. 단 몇 년 동안의 고안, 설계, 채굴, 벼림, 굴착, 용접, 벽돌 쌓기, 창문 내기, 메꾸기, 배관, 배선, 페인트칠을 거치면 사람들은 100층짜리 고층 건물을 지어 300미터짜리 그림자를 드리울 수 있다. 정말이지 인상적이다.


이런 만연체를 발견하게 된다면, 이 저자 참 TMI 스럽다고 치부할 수도 있을 듯싶다. 어설프지만 번역을 해본 개인적 경험으로 추론하면, 번역가이신 김희정 님께 심심한 위로의 말씀을 전달하고 싶다. 물론, 내용도 재미있고 책도 많이 팔렸으니 번역가 역시 행복감을 느꼈을 꺼라 생각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진지한 과학책이 잘 팔리지 않는다. 그러나 이 책은 많이 팔렸다. TV프로 알쓸신잡에서 유시민 작가가 이 책을 추천했기 때문이라 한다.)


번역 서적이지만, 작가의 개성이 온전히 느껴지는 데는 저자가 매우 훌륭한 글쓰기 실력을 갖췄기 때문이 가장 클 꺼라 생각한다. 저자의 어머니는 공부에 대한 열망이 강했던 사람인데, 뒤늦게 대학에 들어간 어머니의 공부(영문학)를 도왔다고 한다. 중세 영어사전을 함께 펼치고, 같은 시를 다르게 읽는 방법을 배웠으며, 동의어 사전을 뒤적이며 정확한 단어를 탐색하기를 즐기는 사람으로 자란다. 그러기에 훌륭한 작가로서의 자양분을 충분히 섭취할 수 있었고, 연구 인생 20년을 담은 이 책에 풍부한 어휘와 세밀하고 정확한 표현으로 가득 채울 수 있었다. 이 책을 추천하는 가장 큰 이유는 과학을 다뤘기 때문이 아니라 일단 재밌기 때문이다. 주제와 내용이 아무리 좋아도 눈이 외면하거나 인상을 쓰며 읽어야 되는 책들도 있는데, 이 책은 쉽지 않은 주제를 매우 재밌게 썼기 때문에, 과학 또는 사람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라면 매우 즐겁게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저자는 자신이 좋아하는 작가가 장 주네Jean Genet라고 책에서 밝히기도 한다. 그녀의 표현에 따르면 장 주네는 '진정성 있는 글을 쓰고, 자신의 의사를 전달하는 데 큰 힘을 들이지 않으며, 인정받으려고 애쓰지 않고, 인정을 받더라도 영향받지 않는' 유기적 작가의 전형이었다. 또, '글쓰기를 따로 배우지 않았기에 전적으로 독창적인 목소리'를 냈다. 그녀의 글쓰기와 과학자로서의 삶(혹은 지향점)도 그런 것 같다. 그녀는 장 주네와 같은 글쓰기 실력을 보여준다. 배우지 않았기에 개성적이고, 문장이 살아 움직이는 느낌을 준다. 과학자로서도 연구를 지속할 '돈'을 확보할 수 있는 연구를 하지만 그 돈에 영향받지 않는 소위 하고 싶어 하는 연구도 끊임없이 진행하였다.





과학자는 어떤 사람일까?


대학교에 12년 동안 머물렀던 나는 가까스로 공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빛나기보다는 누더기가 되었지만 버텨낸 결과로 '박사'라는 호칭을 얻었다. 그러나 과학자 경계의 가장자리에 있으나 과학자가 되지 못한다. 어릴 적, 과학자를 꿈꾸며, 스스로 아인슈타인이 되기를 바랐지만 생각과 두뇌의 회전 속도는 내 바람과는 달랐다. 환경적 조건, 선천적 재능, 개인의 노력의 앙상블이 공진하며 조화를 이룰 때 과학이라는 거대한 추상 속에 작은 흔적이라도 남길 수 있게 되는 것 같다. 나 스스로는 매우 유감이지만 과학자를 동경했고, 되려고 노력했지만 이제 그들을 지원하는 역할을 자청하고 있다.


제일 먼저 나는 색을 본다. 정확히 어떤 종류의 초록색인가? 위쪽이 아래쪽과 다른 색인가? 가운데가 가장자리와 다른 색인가? 가장자리는 어떤 상태인가? 부드러운가? 뾰족뾰족한가? 잎에 수분은 얼마나 차 있나? 시들어서 축 처져 있는가? 주름져 있나? 싱싱한가? 잎과 줄기 사이의 각도는? 잎은 얼마나 큰가? 내 손바닥보다 더 큰가? 내 손톱보다 더 작은가? 먹을 수 있는 잎인가? 독소가 들어 있을까? 햇빛은 얼마나 받고 있나? 잎에 비가 얼마나 자주 내리는지? 병들었나? 건강한가? 중요한가? 하찮은 잎인가? 살아 있나? 왜?


길거리 나무에 지천으로 깔린 나뭇잎을 보면, 어떤 생각이 드는가? 왜, 색깔이 초록일까? 혹은 면밀하게 살펴보며 각양각색일까? 질문을 하고 그 원인을 따지기 위해, 과거 누군가 찾아 놓은 인과관계를 분석하고, 그럼에도 이해가 가지 않으면 근원을 찾기 위해 심연으로 더 깊게 들어가기를 즐기는가? 대다수 사람들은 잎사귀를 없는 존재처럼 여기고 무심코 지나갈 것이다. 시적 감수성이 있는 일부는 "푸른 잎사귀에서 새로운 희망이 싹트는 것을 본다"는 이상한 이야기를 할지도 모르겠다.


호기심 많은 어린이들은 잎사귀를 나무에서 떼는 수고를 귀찮아하지 않으며, 이리저리 살필지도 모르겠다. 그 호기심이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를 거쳐 대학까지 이어진다면 과학자가 될 자질이 있다고 볼 수도 있다. 물론, 탁월한 탐구력에 합당한 우수한 성적이 뒤따르는 경우가 과학자가 되기에 유리할 수 있다(가끔 예외는 있지만 대체로 그렇다는 말이다). 탐구력과 뒷받침하는 성적표를 들고 (잘못된 선택을 감수하며) 대학원에 들어가 석사, 박사 과정을 무사히 마치고도 이런 호기심이 오히려 더 팽창하고, "돈이 없어도 좋아. 이 연구만 꾸준히 할 수만 있으면 좋겠어"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지배한다면 나쁘지 않은('좋은'이 아니다.) 과학자가 될 자질이 있다고 할 수 있다. 호프 자런은 이 책 내내 '난 연구만 하다가 죽어도 좋아'라는 갈망을 반복적으로 이야기한다.


과학자들은 무언가 깊게 사고하는 기질이 강하다 보니 좀 이상한 구석이 있다. 소위, 어릴 때 좋은 선생님을 만나지 못하면 이상한 사람 취급을 당하기 십상이다. 랩걸 호프 자런 역시 스스로 좀 이상하다고 느끼긴 했는데(물론, 그녀는 연구 세계에서는 금수저로 볼 환경도 갖췄다. 그녀의 아버지는 미네소타의 한적한 지역에서 유일한 과학자이자 개인 연구실을 갖춘 교수였고, 그녀는 그곳에 안도감을 느끼곤 했다), 대학의 과학 과목을 수강했을 때, '이상함'이 '좋은 기질'로 여겨지는 세계를 만나게 되었다.


과학 강의들은 아직은 해결이 가능한 사회문제를 다뤘다. 이제는 더 이상 사용되지도 않는 정치 체제, 그것을 제안한 사람이나 반대한 사람이나 모두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죽어버린 그런 정치 체제를 이야기하는 강의들이 아니었다. 과학에서는 애초에 고대 서적에 쓰여 있던 내용을 다시 쓴 책들을 분석하기 위해 쓰여진 책에 관해서 이야기하지 않았다. 과학에서는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미래에는 무슨 일이 일어날 가능성이 있는지를 이야기했다. 지금까지 나를 가르친 모든 선생님들이 귀찮아하고 골칫거리라고 생각했던 나의 특징들(무엇이든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고 모든 것을 지나치게 하는 성향)은 과학 교수들이 원하는 바로 그 특성이었다.


학계는 호프 자런이 수학했던 90년대에도 남녀 차별이 있었고, 지금도 여전히 존재한다. 그럼에도 과학계에서는 기본적으로 남녀의 차이보다 잘하는 사람을 좋아한다(여성으로서 차별이 없다고 말할 수 없지만 잘하는 여자라면 기회를 얻을 수는 있는 영역이다). 호프 자런은 어릴 적 여자로서 차별을 느꼈지만, 과학에서는 그 차별을 극복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가졌다.


과학 교수들은 내가 여자아이였음에도 나를 받아들였고, 내가 이미 의심하던 사실들을 재차 확인해줬다. 바로 내 진정한 잠재력은 내 과거나 현재의 상황보다 투쟁을 마다하지 않는 내 의욕에 있다는 사실 말이다. 다시 한번 나는 아빠의 실험실에서 처럼 원하는 만큼 모든 장난감을 가지고 놀 수 있는, 안전함을 느낄 수 있는 환경을 만난 것이다. 사람은 식물과 같다. 빛을 향해 자라난다는 의미에서 말이다. 과학을 선택한 것은 과학이 내가 필요로 하는 것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가장 기본적인 의미의 집, 다시 말해 안전함을 느끼는 장소를 내게 제공해준 것이 과학이었다.


과학이 삶이고, 삶이 과학인 사람의 심경을 호프 자런은 '죄책감'이 사라진다는 표현으로 이야기한다. 어찌 보면, 과학 이외의 삶은 누군가의 헌신(또는 희생)으로 지탱되기에 과학이라는 장소에서는 안전함과 함께 모든 것을 의지할 수 있다고 볼 수 있다.


내 실험실은 내가 하지 않은 일에 대한 죄책감이 내가  해내고 있는 일들로 대체되는 곳이다. 부모님께 전화하지 않은 것, 아직 납부하지 못한 신용카드 고지서, 씻지 않고 쌓아둔 접시들, 면도하지 않은 다리 같은 것들은 숭고한 발견을 위해 실험실에서 하는 작업들과 비교하면 사소하기 그지없는 일이 된다. 내 실험실은 아직 내 안에 있는 어린이가 모습을 드러내는 곳이다. 그곳은 내가 가장 친한 친구와 노는 곳이다. 내 실험실에서는 웃음을 터뜨리고 말도 안 되는 짓을 할 수도 있다. 그곳에서는 1억 년 된 돌을 분석하기 위해 밤을 새워 일할 수도 있다. 아침이 되기 전에 그 돌이 무엇으로 이루어졌는지 알아내야만 하기 때문이다.


1억 년 된 돌을 분석하면서 밤을 새워 일할 때, 적절한 질문이 무엇인지 찾고, 답을 찾을지도 모르는 영역이 바로 과학이고, 그 탐험이 과학자에게는 인생의 전부라 할 수 있다.


저자는 과학자로 활발한 활동을 해오고 있고, 나름의 성취와 성공을 거뒀지만 여성으로 남다른 다짐과 어려움이 있었다는 이야기를 이 책 곳곳에 담았다. 전통적 여성의 역할 혹은 편견을 부수고 과학자로 살겠다는 다짐에는 비장함까지 느껴진다. (물론, 남성 과학자도 과학으로 성공하기 위해서는 좋은 남편, 아버지, 아들의 역할을 기꺼이 포기해야 하는 경우가 많다. 남녀의 문제 혹은 차별적 요소가 있지만 어떤 일에 미쳐야 되는, 편집증스러운 성향이 강해야 성공하는 모든 분야에서 일하는 모든 사람에게는 비슷한 고민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시골 마을 결혼식을 거쳐 아이들을 낳고, 내 꿈을 펼치지 못한 실망감을 아이들에게 쏟아내면서 아이들의 미움을 받는 운명에서 나를 구하기 위해. 그런 길을 걷는 대신 나는 진정한 성인이 되기 위한 길고도 외로운 여정을 거치기로 결심했다. 약속의 땅은 존재하지 않지만 종착지는 지금 이곳보다는 더 나은 곳일 것이라는 개척자들의 굳은 신념을 가지고 말이다.


사실, 저자는 매우 운이 좋은 편에 속한다. 보통 그녀와 비슷한 환경의 사람들은 일반적인 삶의 즐거움을 누리지 못한다. 하나를 얻으면 하나를 잃는 삶을 살 수밖에 없는 게 현실이고 인생이다. 그러나 그녀는 운명적 사랑을 했고, 결혼을 했는데, 그녀의 남편은 매우 훌륭한 능력이 있어서 그녀가 연구를 위해 어디로든 떠나면 어디에서든 직업을 구할 수 있는 뛰어난 재주가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영혼의 파트너인 연구실 관리자(테크니션) 빌은 20년 넘은 경력자이지만 2만 5천 달러만 받고서도 어떤 연구도 감당하는 연구 덕후이기도 하다. 빌 역시 그녀가 어디로 가든지, 그녀를 따라나선다(보다 엄밀하게는 호프 자런이 소속 대학을 선택하는 중요한 기준은 동업자 빌의 월급을 안정적으로 보조할 수 있는 환경을 확보하는 데 있다).


그럼에도, 그녀가 아이를 낳게 되었을 때 스스로 성 역할을 바꾸겠다는 다짐을 한 부분은 꽤 인상 깊었다. 자신의 이상을 위해, 육아를 포기했다는 선언인데, 남편이 엄마가 되고(혹은 보모를 구했거나) 엄마인 자신은 남편이 되어서 전통적 역할인 바깥일에 전념하겠다는 의미였기 때문이다. 여러 감정이 중첩된 다짐인데, 꽤 많은 생각이 동시에 들었다.


누워 생각에 잠겨 있던 나는, 내가 자주 그렇듯이, 어떤 문제 하나를 해결하지 못한 이유가 그것이 해결 불가능해서가 아니라 해결책이 관습에서 벗어나야 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나는 이 아이의 어머니가 되지 않기로 결심한다. 대신 나는 그의 아버지가 될 것이다. 그것은 나도 어떻게 해야 함지 방법을 알고 있는 일이고, 내가 자연스럽게 해낼 수 있는 일이기도 하다. 나는 이런 생각이 얼마나 이상한 것인가를 생각하지 않은 채 그를 사랑할 것이고, 그도 나를 사랑할 것이며, 모든 게 괜찮을 것이다. 어쩌면 이건 내가 어떻게 해도 망칠 수 없는 100만 년이 넘게 지속되어온 실험 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내가 이렇게 바라보고 있는 이 아름다운 아기가 나를 나보다 더 큰 또 하나의 무언가에 닻을 내릴 수 있도록 할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가 자라는 것을 보고, 그가 필요로 하는 것을 주고, 내 사랑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도록 하는 것이 내 인생의 가장 큰 특권 중의 하나가 될지도 모른다. 어쩌면 나도 이 일을 해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내게는 도와줄 사람이 있고, 충분한 돈이 있고, 사랑이 있고, 직업이 있고, 필요하면 먹을 수 있는 약이 있다. 어쩌면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가 정말로 기쁨으로 거두게 될지 모르는 일이다. 어쩌면 나도 이 일을 해낼 수 있을지 모른다.

인상 깊은 문장과 여러 생각들


이미 소개한 내용으로도 책의 훌륭함을 느끼기에 충분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럼에도 개인적으로 지적 충격 또는 자극을 준 문장들을 몇 개 뽑아 적어보고자 한다.


1995년의 나머지는 금세 지나갔다. 논문 쓸 자격을 주는 필수 시험이자 엄청나게 힘든 세 시간 동안의 구술시험을 통과하고 나자, 논문을 쓰는 것 말고는 할 일이 남아 있지 않았다. 나는 그 작업을 빨리 해냈다. 한 번에 길게 글을 쓰는 것 자체를 즐기기도 하고, 외로움을 모르는 척 지나쳐서 집중하기 위해 텔레비전을 켜 소음으로 방을 채우고 일하기도 했다. 논문을 쓰고 얼마 지나지 않아 졸업을 했다. 박사학위를 받기 위해 보낸 4년이라는 시간이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간 듯했다. 남자 동료들보다 두 배는 더 능동적이고 전략적이어야만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던 나는 박사학위 3년 차부터 교수 자리에 지원했고, 빠른 속도로 성장하는 주립 대학인 조지아 공과대학교에서 채용 제의를 받았다. 내 커리어의 다음 단계가 확고해지고 있었다. 아니, 모든 사람들이 그렇다고 내게 말하곤 했다.


박사과정에 대한 묘사이다. 여성으로서 어려움이 담겨 있어 더 좋았다. 여성이 사회적으로 성공하려면 비슷한 남성보다 더 많이 노력해야 하고, 기민하게 움직여야 한다. 과학의 영역에서도 마찬가지였다는 이야기다.


빌은 지칠 줄 모르는 흙의 전도사 기질을 타고났다. 구멍 하나를 파내러 가서 거기 보이는 미묘한 화학적 구성이나 색깔의 차이, 질감의 변화 등을 집어내는, 신이 내린 자기만의 재주를 지녔기 때문이다. 그는 자기 앞에 놓인 흙과 기억 속에 저장되어 있는 다양한 흙들과의 차이점을 괴로울 정도로 자세히 비교할 수 있었다. 흙에 관해 이야기할 때는 평소의 수줍음도 다 사라지고 만다. 나는 그가 아일랜드식 펍에서 (전혀 취하지 않은 상태로) 지하에서 새로운 조합이 만들어낸 새로운 색을 발견할 때가 일을 하면서 가장 행복한 때라고 극적인 독백을 하는 것을 여러 번 목격했다. 아무도 귀를 기울이지 않는데 말이다.


영혼의 파트너 빌에 대한 소개이다. 보자마자 남다른 인연임을 느꼈다고 한다. 사실 빌이라는 사람 자체는 이 책 내내 풀리지 않은 질문거리였다. 저자가 빌을 이용하고 있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리고 저자는 이 사실을 미안하게 생각한다. 그 사정은 모르겠지만(책 모든 내용을 다루지는 않았을 꺼라 믿고 싶다), 저자가 연구적으로 동등한 역할을 수행한다고 생각하면 보장된 자신의 월급을 반으로 나눠서 빌의 임금을 보장해주면 많은 문제가 해결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빌이 자서전을 쓴다면 그 제목이 <과학에 미친 행복한 노예>가 되지 않을까 싶다. 행복하지만 노예와 같은 삶이 아닐까 싶다.


빌-저자-남편의 관계에서 남편이 빌과 저자의 관계를 인정, 존중해준다고 느꼈다(실제, 남편이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저자의 이 책 말고는 확인할 방법이 없었다). 그럼에도, 일반적 정서와는 거리가 좀 있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다양한 인간관계가 허용될 수 있는 다원성의 세계가 있음을 인정한다면 그리 이상한 관계는 아니라는 생각도 들었다.


언젠가 과학 분야의 교수를 만나면 연구 결과가 잘못될까 걱정이 되느냐고 물어보라. 연구가 불가능한 문제를 선택했거나 연구 과정에서 중요한 증거를 간과했을까 걱정이 되는지 물어보라. 지금도 여전히 찾고 있는 해답이 가지 않은 여러 길에 있지 않을까 걱정이 되는지 물어보라. 과학 분야의 교수에게 무엇이 가장 걱정인지 물어보라. 길게 걸리지도 않을 것이다. 그녀는 당신을 빤히 바라보면서 한마디로 답할 것이다.

"돈이오.”


저자는 조지아 공과대학에서 존스홉킨스 대학으로, 그리고 하와이 대학으로, 지금은 오슬로 대학에서 일하고 있다. 정확한 사정은 모르겠지만 존스홉킨스에서 이미 종신 교수가 될 수 있었는데, 계속 학교를 옮기는 이유는 하고 싶어 하는 연구를 할 수 있는 연구 환경을 끊임없이 갈구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책에서는 빌의 임금을 위해(그의 임금 일부를 학교에서 안정적으로 지불하겠다 약속한) 하와이 대학으로 옮겼다고 밝힌다.


미국에서 자라는 열 살배기 소년 중 가장 큰 아이의 키는 가장 작은 아이의 키에 비해 약 20퍼센트 정도 크다. 이 정도의 차이는 다섯 살, 스무 살의 연령 그룹에도 비슷하게 적용된다. 늘 그 연령대에서 가장 큰 사람은 가장 작은 사람보다 약 20퍼센트 더 큰 것으로 나타난다. 소나무 숲에서는 가장 두꺼운 10년 된 소나무의 두께는 가장 가는 같은 연령의 소나무 두께보다 네 배정도 굵다. 나무가 100살까지 사는 데' 옳은' 방법과 '틀린' 방법은 없다. 오직 성공적인 방법과 그렇지 않은 방법이 존재할 뿐이다.
나무가 되는 것은 긴 여정이다. 그래서 경험이 굉장히 많은 식물학자라도 나뭇가지 나 묘목만을 보고 그 나무가 향후 50년 사이에 어떤 나무로 자라게 될지 정확히 예측할 수 없다. 나무의 성장표가 추측하는 데 유용하기는 하지만 그 표는 미래가 아닌 과거만을 보여준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성장표는 지금은 대부분 죽어 없어진 나무들에서 모은 데이터를 기초로 뽑아 만든 한시적 성격이 강한 선에 불과하다.
이 성장선을 만든 데이터는 영구적인 것이 아니라 새 나무가 자랄 때마다 새 정보가 보태질 수 있고, 그때마다 전체적인 패턴이 살짝 변형되고, 따라서 성장 곡선 자체가 달라진다. 이 곡선의 모양을 수학적으로 예측하는 것은, 최근 등장한 엄청난 용량의 컴퓨터를 동원해도 불가능하다. 이 성장 곡선으로는 특정 나무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를 절대 알 수가 없다. 이 곡선으로 알 수 있는 것은 나무가 과거에 어떤 모습이 었는지 뿐이 다. 모든 나무는 자기 나름의 성장 패턴을 찾아내서 그에 따라 자라는 수밖에 없다.


저자의 뛰어난 글쓰기 실력이 마음껏 발휘되는 영역은 역시나 전공과 관련된 일을 설명할 때이다. 나무에 대한 생각을 적은 부분들이 이 책에서 가장 좋았다. 그녀가 나무에서 인생을 반추하는 일은 지극히 당연하다.


우리 인생 역시,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왔는지가 현재를 말하지만 결국 미래는 확언할 수 없다. 우리 리 개별은 나름의 성장 패턴을 찾아내서 그에 따라 자라날 것이다. 성장이든 노화든, 또는 쇠퇴가 되든 말이다. 그리고 우리의 삶에 '옳은' 방법과 '틀린' 방법은 없다. 결과적으로 '성공적인 방법'과 그렇지 못한 방법이 있을 뿐이다.



알쓸신잡


1. 저자를 소개하는 위키피디아

 https://en.wikipedia.org/wiki/Hope_Jahren

2. 그녀의 연구실 링크

 http://jahrenlab.com/

 http://jahrenlab.com/

(학생이 없는 게 인상적이다. 빌과 Fellow 1명만 있다. 근데, 나라도 도망쳤을 것 같다. 난 덕후가 못되기 때문)


3. 그녀의 남편

https://www.mn.uio.no/ceed/english/research/news-and-events/new-faces/clint-conrad.html

호프 자런을 따라 하와이를 따라간 것까지 책에 소개된다. 역시나 노르웨이도 함께 동행한 것으로 보인다. 그녀가 하고 싶어 하는 연구를 마음껏 할 수 있는 이유는 남편이 아무데서나 일자리를 구할 수 있는 훌륭한 능력이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