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우 특이한 여성 과학자의 사적인, 특별한 이야기
사람들은 바다를 좋아한다. 사람들은 나에게 왜 바다를 연구하지 않느냐고 묻는다. 내가 하와이에 살기 때문에 더 그럴 것이다. 나는 그런 이들에게 바다를 연구하지 않는 이유는 그곳이 외롭고 텅 비었기 때문이라고 대답하곤 한다. 육지에는 바다보다 600배나 되는 생명체가 살고 있다. 사실 그 격차는 주로 식물로 인해 생겨난다. 바다의 평균적인 식물은 약 20일 정도 사는 단세포 생물이다. 육지의 평균적인 식물은 100년 넘게 사는 2톤짜리 나무다. 바다에 사는 식물과 동물의 질량비는 4에 가깝지만, 육지에서는 그 비가 1,000에 달한다. 식물의 개체 수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많다. 미국 서부의 보호림 안에만도 800억 그루의 나무가 산다. 미국 내 나무와 사람의 비는 200을 훨씬 넘는다. 사람들은 보통 식물에 둘러싸여 살고 있지만, 그것을 잘 보지 못한 식물 말고 다른 것이 보이지 않는다.
무엇이 보이는지? 아마도 사람들이 만들어놓은 것들이 보일 것이다. 거기에는 다른 사람들, 자동차, 건물, 인도 등이 있을 수 있겠다. 단 몇 년 동안의 고안, 설계, 채굴, 벼림, 굴착, 용접, 벽돌 쌓기, 창문 내기, 메꾸기, 배관, 배선, 페인트칠을 거치면 사람들은 100층짜리 고층 건물을 지어 300미터짜리 그림자를 드리울 수 있다. 정말이지 인상적이다.
제일 먼저 나는 색을 본다. 정확히 어떤 종류의 초록색인가? 위쪽이 아래쪽과 다른 색인가? 가운데가 가장자리와 다른 색인가? 가장자리는 어떤 상태인가? 부드러운가? 뾰족뾰족한가? 잎에 수분은 얼마나 차 있나? 시들어서 축 처져 있는가? 주름져 있나? 싱싱한가? 잎과 줄기 사이의 각도는? 잎은 얼마나 큰가? 내 손바닥보다 더 큰가? 내 손톱보다 더 작은가? 먹을 수 있는 잎인가? 독소가 들어 있을까? 햇빛은 얼마나 받고 있나? 잎에 비가 얼마나 자주 내리는지? 병들었나? 건강한가? 중요한가? 하찮은 잎인가? 살아 있나? 왜?
과학 강의들은 아직은 해결이 가능한 사회문제를 다뤘다. 이제는 더 이상 사용되지도 않는 정치 체제, 그것을 제안한 사람이나 반대한 사람이나 모두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죽어버린 그런 정치 체제를 이야기하는 강의들이 아니었다. 과학에서는 애초에 고대 서적에 쓰여 있던 내용을 다시 쓴 책들을 분석하기 위해 쓰여진 책에 관해서 이야기하지 않았다. 과학에서는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미래에는 무슨 일이 일어날 가능성이 있는지를 이야기했다. 지금까지 나를 가르친 모든 선생님들이 귀찮아하고 골칫거리라고 생각했던 나의 특징들(무엇이든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고 모든 것을 지나치게 하는 성향)은 과학 교수들이 원하는 바로 그 특성이었다.
과학 교수들은 내가 여자아이였음에도 나를 받아들였고, 내가 이미 의심하던 사실들을 재차 확인해줬다. 바로 내 진정한 잠재력은 내 과거나 현재의 상황보다 투쟁을 마다하지 않는 내 의욕에 있다는 사실 말이다. 다시 한번 나는 아빠의 실험실에서 처럼 원하는 만큼 모든 장난감을 가지고 놀 수 있는, 안전함을 느낄 수 있는 환경을 만난 것이다. 사람은 식물과 같다. 빛을 향해 자라난다는 의미에서 말이다. 과학을 선택한 것은 과학이 내가 필요로 하는 것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가장 기본적인 의미의 집, 다시 말해 안전함을 느끼는 장소를 내게 제공해준 것이 과학이었다.
내 실험실은 내가 하지 않은 일에 대한 죄책감이 내가 해내고 있는 일들로 대체되는 곳이다. 부모님께 전화하지 않은 것, 아직 납부하지 못한 신용카드 고지서, 씻지 않고 쌓아둔 접시들, 면도하지 않은 다리 같은 것들은 숭고한 발견을 위해 실험실에서 하는 작업들과 비교하면 사소하기 그지없는 일이 된다. 내 실험실은 아직 내 안에 있는 어린이가 모습을 드러내는 곳이다. 그곳은 내가 가장 친한 친구와 노는 곳이다. 내 실험실에서는 웃음을 터뜨리고 말도 안 되는 짓을 할 수도 있다. 그곳에서는 1억 년 된 돌을 분석하기 위해 밤을 새워 일할 수도 있다. 아침이 되기 전에 그 돌이 무엇으로 이루어졌는지 알아내야만 하기 때문이다.
시골 마을 결혼식을 거쳐 아이들을 낳고, 내 꿈을 펼치지 못한 실망감을 아이들에게 쏟아내면서 아이들의 미움을 받는 운명에서 나를 구하기 위해. 그런 길을 걷는 대신 나는 진정한 성인이 되기 위한 길고도 외로운 여정을 거치기로 결심했다. 약속의 땅은 존재하지 않지만 종착지는 지금 이곳보다는 더 나은 곳일 것이라는 개척자들의 굳은 신념을 가지고 말이다.
누워 생각에 잠겨 있던 나는, 내가 자주 그렇듯이, 어떤 문제 하나를 해결하지 못한 이유가 그것이 해결 불가능해서가 아니라 해결책이 관습에서 벗어나야 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나는 이 아이의 어머니가 되지 않기로 결심한다. 대신 나는 그의 아버지가 될 것이다. 그것은 나도 어떻게 해야 함지 방법을 알고 있는 일이고, 내가 자연스럽게 해낼 수 있는 일이기도 하다. 나는 이런 생각이 얼마나 이상한 것인가를 생각하지 않은 채 그를 사랑할 것이고, 그도 나를 사랑할 것이며, 모든 게 괜찮을 것이다. 어쩌면 이건 내가 어떻게 해도 망칠 수 없는 100만 년이 넘게 지속되어온 실험 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내가 이렇게 바라보고 있는 이 아름다운 아기가 나를 나보다 더 큰 또 하나의 무언가에 닻을 내릴 수 있도록 할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가 자라는 것을 보고, 그가 필요로 하는 것을 주고, 내 사랑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도록 하는 것이 내 인생의 가장 큰 특권 중의 하나가 될지도 모른다. 어쩌면 나도 이 일을 해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내게는 도와줄 사람이 있고, 충분한 돈이 있고, 사랑이 있고, 직업이 있고, 필요하면 먹을 수 있는 약이 있다. 어쩌면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가 정말로 기쁨으로 거두게 될지 모르는 일이다. 어쩌면 나도 이 일을 해낼 수 있을지 모른다.
1995년의 나머지는 금세 지나갔다. 논문 쓸 자격을 주는 필수 시험이자 엄청나게 힘든 세 시간 동안의 구술시험을 통과하고 나자, 논문을 쓰는 것 말고는 할 일이 남아 있지 않았다. 나는 그 작업을 빨리 해냈다. 한 번에 길게 글을 쓰는 것 자체를 즐기기도 하고, 외로움을 모르는 척 지나쳐서 집중하기 위해 텔레비전을 켜 소음으로 방을 채우고 일하기도 했다. 논문을 쓰고 얼마 지나지 않아 졸업을 했다. 박사학위를 받기 위해 보낸 4년이라는 시간이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간 듯했다. 남자 동료들보다 두 배는 더 능동적이고 전략적이어야만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던 나는 박사학위 3년 차부터 교수 자리에 지원했고, 빠른 속도로 성장하는 주립 대학인 조지아 공과대학교에서 채용 제의를 받았다. 내 커리어의 다음 단계가 확고해지고 있었다. 아니, 모든 사람들이 그렇다고 내게 말하곤 했다.
빌은 지칠 줄 모르는 흙의 전도사 기질을 타고났다. 구멍 하나를 파내러 가서 거기 보이는 미묘한 화학적 구성이나 색깔의 차이, 질감의 변화 등을 집어내는, 신이 내린 자기만의 재주를 지녔기 때문이다. 그는 자기 앞에 놓인 흙과 기억 속에 저장되어 있는 다양한 흙들과의 차이점을 괴로울 정도로 자세히 비교할 수 있었다. 흙에 관해 이야기할 때는 평소의 수줍음도 다 사라지고 만다. 나는 그가 아일랜드식 펍에서 (전혀 취하지 않은 상태로) 지하에서 새로운 조합이 만들어낸 새로운 색을 발견할 때가 일을 하면서 가장 행복한 때라고 극적인 독백을 하는 것을 여러 번 목격했다. 아무도 귀를 기울이지 않는데 말이다.
언젠가 과학 분야의 교수를 만나면 연구 결과가 잘못될까 걱정이 되느냐고 물어보라. 연구가 불가능한 문제를 선택했거나 연구 과정에서 중요한 증거를 간과했을까 걱정이 되는지 물어보라. 지금도 여전히 찾고 있는 해답이 가지 않은 여러 길에 있지 않을까 걱정이 되는지 물어보라. 과학 분야의 교수에게 무엇이 가장 걱정인지 물어보라. 길게 걸리지도 않을 것이다. 그녀는 당신을 빤히 바라보면서 한마디로 답할 것이다.
"돈이오.”
미국에서 자라는 열 살배기 소년 중 가장 큰 아이의 키는 가장 작은 아이의 키에 비해 약 20퍼센트 정도 크다. 이 정도의 차이는 다섯 살, 스무 살의 연령 그룹에도 비슷하게 적용된다. 늘 그 연령대에서 가장 큰 사람은 가장 작은 사람보다 약 20퍼센트 더 큰 것으로 나타난다. 소나무 숲에서는 가장 두꺼운 10년 된 소나무의 두께는 가장 가는 같은 연령의 소나무 두께보다 네 배정도 굵다. 나무가 100살까지 사는 데' 옳은' 방법과 '틀린' 방법은 없다. 오직 성공적인 방법과 그렇지 않은 방법이 존재할 뿐이다.
나무가 되는 것은 긴 여정이다. 그래서 경험이 굉장히 많은 식물학자라도 나뭇가지 나 묘목만을 보고 그 나무가 향후 50년 사이에 어떤 나무로 자라게 될지 정확히 예측할 수 없다. 나무의 성장표가 추측하는 데 유용하기는 하지만 그 표는 미래가 아닌 과거만을 보여준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성장표는 지금은 대부분 죽어 없어진 나무들에서 모은 데이터를 기초로 뽑아 만든 한시적 성격이 강한 선에 불과하다.
이 성장선을 만든 데이터는 영구적인 것이 아니라 새 나무가 자랄 때마다 새 정보가 보태질 수 있고, 그때마다 전체적인 패턴이 살짝 변형되고, 따라서 성장 곡선 자체가 달라진다. 이 곡선의 모양을 수학적으로 예측하는 것은, 최근 등장한 엄청난 용량의 컴퓨터를 동원해도 불가능하다. 이 성장 곡선으로는 특정 나무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를 절대 알 수가 없다. 이 곡선으로 알 수 있는 것은 나무가 과거에 어떤 모습이 었는지 뿐이 다. 모든 나무는 자기 나름의 성장 패턴을 찾아내서 그에 따라 자라는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