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엄마의 유산

엄마에 대한 단상 8

by 벌판에 서서

난 엄마로부터 아무것도 받지 못하고 오히려 무관심 속에서 몸을 떨며 지냈고 자라왔다고 생각했고 또 커서는 나의 의지와 꿈, 고통을 전혀 이해받거나 지지받지 못하고 살아왔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왜 지금 난 이렇게 당당하고, 훌륭하다고 생각할 만큼 잘 살아왔고, 잘 나이 들었으며, 자신에 대한 믿음이 확고할까? 무언가 가치 있는 일을 하고 싶고, 꼭 할 것이라는 굳은 의지를 가질 수 있었을까? 이것은 어디에서 온 것인가? 끊임없이 반문해본다.

분명 엄마의 어떤 정신, 끝까지 희망을 잃지 않는 믿음. 잘될 것이라는 자신에 대한 긍정적 자부심, 이런 것이 나에게도 똑같이 흐르고 있는 것일 것이다. 나도 엄마처럼 모진 결혼생활을 이겨내고, 아니 견뎌내고 내 자식들에 대한 끈을 목숨처럼 놓지 않으며 살아왔다.

이제 생각하면, 나의 엄마는 자신의 삶의 자세를 꿋꿋히 견지하며 주렁주렁 달린 자신의 자식들의 손을 놓은 적이 없다. 자신의 방법(가치관 같은 것?)을 버린 적도 없다. 때로 인생길에서 길옆의 꽃구경도 하고 우리 자식들을 편하게 건사하지 못했거나 온전히 눈길을 주지는 못했을지언정 자신이 가야 한다고 생각한 길에서 한시도 벗어난 적이 없었다. 그것이 굴레이고 지독한 진창길이어도 그냥 그것을 받아들이고 살아내었다. 그것이 인간이고 그것이 부모라고 생각하신듯하다.

엄마는 그런 삶의 자세, 삶의 괘적을 나에게 남기셨다. 그것은 어디서도 살 수 없고 어떤 인위적 노력으로도 얻을 수 없는 것이다. 엄마의 그랬던 자세가 내 앞에 떡 놓여 나를 관통하고 있었기에 나의 자세도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되어가고 나도 그렇게 길을 걸어 진창길과 어둠의 터널을 지나왔다. 지독히 힘들고 죽을 것 같아도 그냥 걸을 수 있었다. 이 길의 끝이 있고 이 지독한 어둠이 오히려 반등의 신호라는 것을 나는 저절로 믿을 수 있었다. 그런 것을 엄마가 그렇게 살아내시면서 내 인생에 얹어 준 것이다. 그 길의 줄거리를 따라갈 수 있게 나도 모르게 그냥 그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게 해 준 것이다.

내가 지독한 인생의 어둠을 견디고 묵묵히 걸어올 수 있게 해 준 것은 나도 모르게 나를 인도한 엄마의 길이 내 삶 속에 녹아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길을 걸은 엄마의 손에 질질 이끌려 따라 살았기 때문이다.

그것이 엄마의 위대한 유산이고 엄마의 혼이다. 누구도 앗아 갈 수 없고 또 벗어나고자 하여도 벗어날 수 없는 그런 방향을 내 앞에 턱 놓아준 것이다. 무형의 것. 누구도 떼어갈 수 없는, 내 속에 녹아 있는 것. 엄마가 몸소 보여주며 같이 걸었던 인생길, 아니 같이 걸었던 것이 아니라 우리를 끌고 앞만 보고 걸으셨던 길. 힘들고 참혹했지만 그것은 내 속에 흐르고 체화되어 나를 이끌었다. 그리고 내 인생길에서 방향을 놓치지 않고 걷게 해 주었다.

엄마는 내가(우리 자식들이) 엄마가 생각하는 그 자리에 그 모습으로 존재 하고 있다고 생각하였던 것은 아니었을까? 그냥 식구들이 다 같이 밥을 먹을 때 밥을 먹고 학교 가고 그냥 그곳에 항상 그런 모습으로 존재하는 자식. ‘어, 그렇다.’ 하고 곧바로 자신의 길을 가는 그런 엄마였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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