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수호천사에게

엄마에 대한 단상 3

by 벌판에 서서

내 어린 시절 엄마는 나에게 일상생활에서 적응할 수 있게 하는 방법이나 요령을 별로 전하지 못했다. 물론 살면서 몇 가지 중요한 설명이나 가르침이 있었지만 전반적으로 내가 학교나 사회에서 한 인간으로 살아갈 수 있는 기술을 때에 맞춰 전수해주지 못한 것이다. 나는 엄마가 나에게 무관심으로 일관했다고 오랫동안 생각하고 있었다. 엄마의 자상한 관심에 대한 갈증이 나를 스스로 왜소하게 느끼게 하고 헐벗은 거지 소녀로 생각하게 하였다.

그 거지 소녀의 빈 자리를 채워주고 위무해준 존재가 바로 나의 수호천사이다.

살면서, 더 이상 암울할 수 없을 만큼, 출구가 없는 밑바닥이라고 생각하고 집을 나가버리고 싶다거나 죽어버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도 나도 모르게 그렇지 않은 쪽으로 결정하고 그쪽으로 어느새 가고 있었던 것. 어떻게 해서든 나쁜 쪽으로 결정이 되지 않았고, 힘겨운 현실을 꾹 참고 나아가게 하는 힘 같은 것, 나를 지켜주는 어떤 힘이 나를 손잡아 준 것이라고 선명히 느끼게 하는 그런 것이 있었다.

나 혼자 진창길을 헤치며 주저앉지 않기 위해 온 힘을 다해 그 지루하고 어두운 길을 빠져나가서 뒤돌아보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 길을 지름길이었고 내가 잘 헤쳐나왔다는 것을 문득 알게 된다. 어떤 때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아슬아슬하게 위험을 피하게 되었다는 것을 깨우치게 되고, 왠지 단단하고 안전한 곳을 디디고 무심히 걸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무형의 어떤 것에 의해 인도 된 것이라는 심증을 굳히고는 했다. 그냥 앞을 보고 걸어갔을 뿐인데 그토록 짙은 멸망의 골짜기에 떨어지지 않고 걷게 되었다는 것에 안도했다.

나의 수호천사는 내가 느끼기에 엄청 영향력이 크고 다른 누구의 천사보다 나를 사랑한다고 생각하였다. 이럴 때 난 선택받은 인간이라는 자부심을 몰래 키우고는 했다. 그것은 험한 세상 혼자 고되게 걸어간다고 생각한 나에게 큰 힘을 주고 내 등 뒤를 든든하게 받쳐주었다.

내 앞길에도 언젠가 밝은 햇빛이 비칠 것이라는 희망이 있었다. 내가 뭔가 의미 있는 일을 할 것이고 내가 원하는 어떤 것을 이룰 수 있으리라는 믿음도 그냥 본래부터 내 안에 내재된 것처럼 존재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문득 내가 수호천사라고 생각했던, 뒤를 받쳐주고 내 손을 잡아 이끌어주는 무형의 존재가 엄마와 아버지가 살아낸 삶의 길들이 내 주변에 무형의 틀로 나도 모르게 전수되어 나를 이끌어준 것은 아닌가 하고 문득 생각해 보게 되었다.

어려서부터 수호천사라고 생각했던 어떤 것(분명히 있었고 나를 수호해서 내가 걸어갈 수 있게 한 것들)은 나의 조상들, 내 부모들, 주변에서 같이 삶을 살아 간 사람들의 흔적이라는 것이다. 그들의 무형의 정신과 삶의 궤적들이 나를 감싸고 나를 지켜주는 보호벽으로 존재했고, 또 존재하고 있다고 것을 생각하게 된 것이다. 그 모든 것이 내 인생길을 이끌어주었고 또 지금도 튼튼하게 내 주위에서 포진하고 있다는 생각이 드디어 든 것이다. 내가 어떤 결정을 할 때 무언의 지도, 틀, 방향타가 되어주는 것이라고. 그중 가장 심적으로 가깝고 강렬했던 내 엄마의 삶의 궤적이 나에게 값진 유산으로 남아 나를 감싸고 있다는 것을 생생히 느끼게 된 것이다.

이런 생각이 요즘 내 삶을 밝게 하고 따듯하게 해 준다. 엄마의 틀을 물려받아 그것을 내 식대로 쓰고 있는 것.

나를 둘러싸고 있는 그런 엄마의 알 수 없는 유산이 조금씩 언듯언듯 보일 때 마음이 환해지고 자신감이 퍼져 오른다. 이것이 나에게 남아있는 엄마이다. 이것이 나에게 있어서 내 엄마의 존재의 이유이자 내 속에 살아있는 엄마이다.

설익게 성장하여 엄마를 원망하고 엄마에게 화를 내던 나는 한 거지 소녀로 황야에 헐벗고 서 있었다. 지금 아주 단편적으로나마 엄마의 삶이 내 삶에 드리워져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서는 더 이상 난 거지 소녀가 아니다. 나에게서 거지의 흔적은 나도 모르게 없어져 버렸다. 엄마에게 내가 말할 수 없는 덕을 입고 있었고, 입고 있다는 것, 엄마는 그동안 지켜주었고 감싸주었고, 내 삶의 결정에 역할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조금이나마 (아주 조금) 감지하게 되었다. 그 아주 조금이 내 마음을 꽉 채우고 삶에 자신감을 쑥쑥 오르게 한다. 그 티끌 만큼의 앎이 이 세상 모두를 다 사고도 남을 만큼의 가치를 가졌다. 난 그것을 가졌다. 그리고 앞으로 나간다. 풍족하게 단단한 걸음으로.

요즘 거울을 보면 내 모습에서 엄마의 모습이 보일 때가 있다. 아하, 하고 감탄한다. 엄마는 뜨거울 만큼 따뜻한 가슴으로 삶을 살아낸 사람이다. 때로 남루하게, 때로 아버지의 멸시를 받으면서도 인생에 대한 자신감과 용기를 잃지 않고 아버지라는 큰 어려움을 감내하고 참아내며 몸을 부딪치고 살아내신 분. 아니꼽고 치사한 남편에 나름으로 저항하면서도 끝내 집을, 우리를 떠나지 않으셨던 분.

자식들의 무시와 무관심도 그저 받아 내시고 화가 나시면서도 그래도 우리에게 애절하게 매달리셨던 분. 우리 자식들에게는 자존심조차도 버리셨던 분. 그런 삶의 모습이 나에게 남아 흐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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