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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고 싶은데 그런 슬픈 기분인걸

손절할 때쯤 돼서야 거절할 수 있는 사람? 저요.

by 김타닥

캐치미, 캐치유 그거 맞다.

가사가 심금을 울려서 살짝 바꿔봤는데 어쨌든 그거 맞다.

한 가지 차이점이 있다면 이제 숨바꼭질은 그만(그만~)하는 가사와 다르게 나는 인간관계에서 숨바꼭질을 미친 듯이 하다가 이 놀이를 포기하고 싶어 질 때쯤에서야 야, 이제 그만 놀자. 안 되겠다.라고 말하는 것 말고는 할 수가 없는 성격의 소유자라는 것 정도다.


이놈의 '웬만해서는 좋게 좋게 넘어가는 성격'이 단점인지도 모르겠다. 웬만한 건 '그럴 수 있지'와 '내가 예민한가' 사이에서 장애물 달리기를 하며 인간관계를 드리블하기 일쑤지만, 그것이 쌓이고 쌓여서 도통 그럴 수 없어지고, 내가 예민한지 아닌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을 만큼 화가 날 때쯤에 주로 문제가 발생하는 것 같다.

어쩌다 이렇게 됐는지는 잘 모르겠다. 다들 보통의 인간관계에서 마치 식당에서 물 한잔 더 달라고 하듯이 어, 이건 아닌 거 같아, 고쳐주라. 하고 상대방이 그것을 시정하면 다시 하하 호호 텔레토비 동산으로 돌아가는데, 나만 만나서 더러웠고 다신 보지 말자. 를 외치며 울며 돌아서는 것은 아니리라.


앞서 말했던 영어회화스터디. 내가 스터디 파트너의 칭찬을 하곤 하면 그럼 저는요? 제 칭찬은요? 하고 칭찬에서 조차 제 몫 챙기기에 열을 올리던 그녀는 한 스터디원이 대기업에 재직 중인 것 같은 정황이 포착되자 그의 신상정보를 스터디 때 낱낱이 캐올 것을 내게 종용한다던가, 연애사를 꼬치꼬치 캐묻더니 '전애인에게 미련이 있는 것이 아니냐? 그런 것 같은데?' '당신은 남자 보는 눈이 없으니 내게 남자 검사라도 받아야 할 판이다'등의 갸우뚱한 발언을 주워섬기곤 했다. 나는 그래도 이 스터디가 월에 5만 원의 다소 프리미엄틱한 가격으로 운영되는 중이며 스무 명이 넘는 꽤 넓은 풀을 보유하고 있어 그것으로 말미암아 내 영어실력에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하고 눈을 흐릿하게 뜨곤 했다. 내가 예민한가? 그것이 아무래도 좋으니까 제발 그녀가 내 인생에서 나가주었으면 해서 탈출버튼을 누르게 된 계기는 놀랍게도 AI로 만드는 지브리 일러스트 때문이었다. 한창 유행하던 그것 맞다. 일러스트는 오픈 AI의 서버뿐만 아니라 내 인내심도 살살 녹였는데, 그녀는 내 프로필 사진을 보고 유료버전을 사용 중이냐고 물었고, 자신은 유료버전이 아니라며 다섯 장을 변환해 줄 것을 요청하더니, 변환해 준 그것을 꿀꺽하고 입을 싹 씻더니 다섯 장을 추가로 요구했다. 안녕의 순간이었다.


예시의 사례를 보고 당신은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저는요, 제 칭찬은요? 했을 때 제가 그쪽 칭찬을 왜 해드려요? 하고 뚱하게 대답하거나, 그것도 아니면 신상정보를 캐오라고 시켰을 때 즘에 그렇게 궁금하시면 그쪽이 직접 물어보세요,라고 말하거나, 남자검사를 받네 어쩌네 했을 때는 말씀이 지나치시네요. 선을 지켜주세요,라고 말할 수 있는 기회가 내게 얼마든지 있지 않았느냐고. 사실이다. 통렬하게 느껴지는 사실이다.


하지만 제목에서도 말했듯 나는 그게 잘 안 되는 사람이다. 그게 잘되는 사람이 있다면 돈을 주고라도 배우고 싶은 심정이다. '좆 까라고 말해요' '작작하는 게 좋겠다고 말하는 방법' '관계를 쫑내지않고 부드럽게 거절하는 방법' 류의 강의나 에세이가 있다면 내게 언제든 추천해 달라. 얼마든지 구매할 용의가 있다. 그런데 아직 그것을 깨우치지 못한 나는 인간관계의 장애물 달리기에서, 하늘이 노랗게 뜨고 탈진해서 자리에 주저앉아을 때쯤 돼서야, 더 나아가 그 경기장에 다시는 진입하지 않을 각오를 마치고 나서야 그만하겠노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고쳐야 하는 것은 알지만 마음의 소리는 그래도 작게 외치는 것이다. 애초에 선을 안 넘으면 되잖아! 애초에 탈진할 만큼 나를 혹사시키지만 않으면 난 손절까진 안 하는 사람이라고! 내 주변에 작고 소중하게 남은 인간관계들은 모두 그 선을 넘지 않은 사람들로 이루어져 있고, 그 풀을 조금이라도 넓히려고 고전하는 내 입장에서는 이런 탈출버튼의 사태들이 발생할 때마다 절망하는 수밖에 없다. 매번 잘해볼 순 없겠지만 적어도 조금 더 잘해볼 수 있다면 좋을 텐데. 말할 수 없어 말하고 싶은데 그런 슬픈 기분인걸. 오늘도 그렇게 외치기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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