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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은 꼭 늦게 해야 돼요, 언니

늦게는 얼마나 늦게인 지를 물어봤어야 하는 건데

by 김타닥

저 말을 누가 했는가.

나보다 일찍 결혼한 동생도아니오 먼저 간 선배도아니오 다만 서울 모 터미널에서 길을 알려준 직후, 가벼운 목례를 하고 자리를 뜨려던 내 뒤통수에 대고 어떤 무당이 해준 말이었다.


네? 하고 놀라 돌아서자 그녀는 내가 취업을 일찍 한 것과 디자이너로 일하는 것을 술술 읊어 맞추더니, 급기야 내 폭풍 같은 연애사와, 어제도 앞으로도 남자 때문에 많이 울 것임을 예견했다. (네?) 내가 놀라 전부 맞췄음을 시인하자 그녀는 길을 알려준 대신이라며, 궁금한 것이 없냐고 내게 물어보길래 나는 그 당시 고민이던 이직자리에 관한 질문을 했고, 몇 가지 조언을 더 해준 그녀는 이야기를 좀 더 나누고 싶냐고 물어봤으나 내가 시간관계상 그것은 어렵고, 대신 답례를 하고 싶다고 하자 복채로 자판기에서 물을 두 병 받아 들더니 자리를 떠났다. 마침 켜져 있던 카카오맵으로 행인에게 길을 찾아준 것 치고는 과분한 답례를 받아버린 나였다.


제일 기억에 남는 것은 '결혼은 꼭 늦게 해야 돼요, 언니.'라는 저 첫마디일진데, 사실 어릴 때부터 재미로 본 인터넷 사주부터 돈을 벌기 시작한 후로부터 비싼 돈을 주고 본 신년운세에 이르기까지 공통적으로 내게 하는 말의 요지는 저것과 같았다. 얼마나 늦게인지 왜 그런 것인지는 뾰족하게 설명해주지 않았지만 아무튼 늦게 하라는 말은 마치 필수요소처럼 내 인생에 따라붙었다.


엄마까지 그런 얘길 했으니 말 다했다. 넌 적어도 서른은 넘어서가야 해. 딱 잘라 말하던 엄마는 내가 결혼의 위기(?)를 몇 번 겪었을 때도 그 입장을 고수했다. 이유를 묻는 내게 엄마는


"넌 아직도 모르겠니? 니 성향이 그래. 무당이 아니라도 알겠다,

네가 결혼 늦게 해야 된다는 거! 그냥 니 성격이랑 성향이 그런 거야."


라고 대답했지만 나는 열 달 배 아파 낳고 길러준 엄마의 저 말에서조차 무당의 신탁과 크게 다르지 않은 모호함만 잔뜩 느낀 채 물러서는 수밖에 없었다.


'결혼을 늦게 해야 하는 팔자 내지는 성격'이라는 게 도대체 어떤 건지는 감이 안 오지만, 예로부터 여러 명이 같은 내용의 조언을 하면 듣는 편이 좋다는 걸 수많은 동화 및 미디어 매체로 접해서(말을 듣지 않아 망하는 케이스에는 대표적으로 공포영화나 재난영화가 있겠다) 잘 알고 있는 나는 인생의 장르를 굳이 바꾸지 않기 위해 막연하게 그래야겠거니, 생각하고 살곤 했다.


연애할 때 지나치게 푹 빠져버리기 일쑤에, 그들이 실제로 나를 많이 울린 것인지 내가 원체 울어서인지 연애의 과정과 끝에 두부정도는 쉽사리 만들 만큼 눈에서 간수를 쏙 빼는 일이 잦다는 거 정도 말고는 감이 안 오는데 -혹시 이만하면 충분한 사유가 되는데 내가 눈치채지 못하는 걸까?- 그런 성향의 사람 모두가 이렇게 열 명 중 열명에게 결혼을 늦게 하라는 조언을 듣지는 않을 텐데. 모임을 하나 만들까도 싶다. '결혼 늦게하란 소리 열명이상에게 들어본 사람들의 모임' 뭐 이런 거.


늦게만 하면 아무나랑 해도 되는 건지, 어떤 사람이랑 결혼해야 하는 건지는 특별히 꼬집어주는 사람이 없어서 나는 눈만 맨송맨송 뜨고 있는 것이다. 물론 뭐 누가 이런 사람 만나세요, 말해준다고 한들 평생의 반려를 정하는 일인데 그 기준치에 맞지 않으면 다 쳐내버릴 생각까지는 크게 없거니와, 그게 맘대로 되지도 않겠지만, 아무튼 매 연애마다 끝은 결혼이리라 상정하고 매번 진심으로 임하는 나에게는 이는 참으로 어려운 명제였다.


어릴 때는 막연히 스물일곱에서 여덟쯤 어떤 사람과 만나 이삼 년쯤 연애를 하고 서른 살에 결혼에 골인!이라는 목표를 가지고 있었기도 했다. 꽤 어릴 때부터 아이는 몰라도 결혼에 대한 생각은 확고했으니. 하지만 정신 차리고 보니 그 목표치였던 스물일곱도 어느덧 반가까이 지나고 있는 처지가 되자 문득문득 조바심이 올라오곤 했다. 다니던 정신과 선생님과 미래 배우자에 대한 담론을 나누던 중 선생님께 잘 맞는 사람을 못 찾으면 어쩔지에 대한 고민을 털어놓차, 선생님은 심드렁하게


"그만큼 좋은 사람 아니면 굳이 안 만나면 돼요. 혼자 살아도 힘든 게 인생인데

둘이 살면 더 힘들어. 뭣하러 굳이 난이도를 올려요."


라고 대답해 주셨고, 나는 막차를 놓쳐버리면 그냥 그래 굳이 안 그래도 어려운 인생 더 어렵게 만드느니 그냥 혼자 살리라, 생각하고 살아야 되는 것인가 눈만 꿈벅였다. 하지만 결혼은 꼭 하고 싶은걸요.


안 그래도 간수를 많이 빼서 단단해져 버린 내가 조금은 후루룩 넘기기 쉽도록 간수를 조금만 덜 빼줄 사람이면 좋겠다, 정도의 막연한 기준만 가진 나는 과연 목표를 이룰 수 있을까? 이 100세 시대에 마흔이나 쉰이 넘어서야 짝을 만나 어쩌면 정말로 '늦게'가야 한다는 신탁을 이뤄낼지도 모른다. 가능하면 조금만 늦으면 좋으련만. 약속장소에서 늦어서 뛰어오는 사람을 보고 화가 나지 않을 정도로만. 미안, 길이 어찌나 막히던지, 같은 가벼운 사유로 충분히 용서되는 만큼으로만. 무슨 느낌인지 다들 아리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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