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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태라 Dec 28. 2023

한 세계를 통과하며: 「죽음의 자궁과 소년의 통과의례」

제2회 대한민국소설독서대전 대상 수상작

본인이 대상을 수상한 「죽음의 자궁과 소년의 통과의례」가 실려 있는 책이다. 본작은 독서 에세이 혹은 서평에 속하는 글인데, 내가 ‘죽음의 자궁’이란 개념을 세상에 내보낸 최초의 작품이기도 하다.


죽음의 자궁이란 상징적으로 존재(본성)를 죽이는 세계를 뜻한다. 자궁은 미성숙한 생명체가 자라는 공간인데 그것이 생명이 아닌 죽음에 잠식돼 있는 경우. 미성숙한 생명체는 자궁에 의존적이기에 그것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의 본질이 죽음이라면 그 안에서 본래의 자기로 성장할 수도 없다.


거대한 덫이자 무덤 같은 세계인 ‘죽음의 자궁’을 존재는 어떻게 ‘통과’해야 하는가? ‘외부의 힘’에 의해서다. 그러나 그 외부의 힘은 자궁 속 존재와 별개인 타자가 아니라 그의 ‘큰 나’에 해당하는 힘이다. 사실 근본적으로 인간의 삶 전체가 죽음의 겹자궁을 한 겹씩 탈피하여 저 ‘큰 힘’을 체화하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죽음의 자궁과 소년의 통과의례

김태라


  집은 하나의 세계이다. 특히 아이에게 있어 부모가 있는 집은 존재의 모태가 되는 근원적 공간이다. 자궁을 벗어날 수 없는 태아처럼 집은 아이에게 절대적이다.


  “유준의 집은 방이 여럿이었다”로 시작하는 소설 「소년이로少年易老」는 집이라는 세계에서 ‘자라기도 전에 늙어버린’ 두 소년에 대해 이야기한다. 유준이 부모와 함께 사는 집이 있고 그 집에 놀러 오는 소진이라는 소년이 있다. 소진은 유준을 절친히 여기지 않으면서도 유준의 집에 이끌려 그곳을 자주 드나든다. 폭력적인 아버지와 극성스런 형제들로 시끄러운 자기 집과 유준의 “크고 조용한 집”은 완전히 다른 세계이기 때문이다. 소진은 제집에서 느낄 수 없는 빈 공간의 고요와 적막에 매혹된다.


  공간(空間)은 글자 그대로 ‘비어 있는’ 곳이다. 이 ‘공(空)’이 집을 구성한다. 그리고 아이에게 집은 곧 부모와 같다. 유준이 살고, 소진이 머무는 그 집에는 “병의 기운을 풍기는 아버지”와 “다정하지 않은 어머니”가 있다. 복수가 차서 부풀어 오르는 아버지의 몸, 이 비대해지는 죽음이 빈 공간을 잠식한다. 아버지의 약 냄새로 가득 찬 괴괴한 집을 통제하는 사람은 차갑고 매서운 눈을 가진 어머니이다. 냉기가 심한 손님방에서 소진이 자고 갈 때도 “난방 온도를 높여주는 법이 없는” 유준 어머니는 유준 아버지가 쓰러진 뒤 공장을 도맡게 되면서 성격이 더욱 강퍅해진다.


  죽어가는 아버지와 온정 없는 어머니가 지배하는 폐쇄적인 집. 그곳 어디에도 부모의 든든한 보호와 따뜻한 사랑 같은 건 없다. 부모 혹은 그들의 “압도적인 그림자”는 큰 집의 빈 공간처럼 없는 듯이 존재한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스스로 의식하지 못한 채, 어리고 여린 생명에게 불안과 두려움을 심는다. 아이의 마음은 부모, 혹은 집이라는 자궁에 갇혀 있는 것이다. 생명의 자궁이 아니라 ‘죽음의 자궁’ 속에.


  그것은 ‘죽음’이지만 또한 ‘자궁’이기에, 어린 마음에 “낯설면서도 익숙”하게 느껴진다. 집의 고요와 어둠처럼. 집안의 어둠이 커질수록 아이들의 빛은 사그라든다. 그럼에도 그들은 미성년이기에 부모라는 자궁에서 벗어날 수 없다. 아직 부모의 그늘 아래서 더 자라야 하는 아이들은 자신이 속해 있고 자기 존재를 품고 있는 죽음의 세계에서 빠져나올 생각조차 하지 못한다. 자궁 안의 태아처럼, 태어날 때부터 거기에 있었던 것처럼, 그들은 그곳에서 당연하게 먹고 자고 살아간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아이들은 생명의 꽃을 제대로 피워보기도 전에 죽음의 기운에 먹혀든다. 유준은 아버지가 쓰러진 뒤 갑자기 살이 찌면서, 복수로 부풀었던 아버지처럼 몸집이 비대해진다. 어머니처럼 신경도 예민해져, 소진이 다른 아이들과 어울리는 것을 보면 “얼굴이 굳고 눈빛이 딱딱해”진다. 소진은 죽음을 상징하는 북쪽 방에서 잠들며 “몸이 무겁고 아픈 기운”을 느낀다. 그러면서도 유준의 집을 떠나지 못하고 “땅 속으로 들어가는 듯한 기분”으로 유준 아버지의 서재에 들어간다. 소진은 그 어둡고 밀폐된 방을 비밀 공간처럼 드나들며 잠겨 있는 책상 서랍을 흔들어본다. 그리고 그 서랍 속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궁금해 하지만 끝내 상상해내지 못한다.


  유준 아버지가 쓰러진 뒤 잠겨 있던 서랍이 열리고, 소진은 그 서랍 속에 아무것도 없는 것을 확인한다. 유준과 함께 묻었던 죽은 새의 무덤이 텅 비어 있는 것처럼. 집의 빈 공간, 빈 서랍, 빈 무덤. 바로 ‘무(無)’의 형상이다. 그것은 사랑과 온기 없는 부모처럼, 빈집의 어둠과 정적처럼, 없는 듯 있음으로써, 혹은 있는 듯 없음으로써 순수한 정신을 매혹하고 지배한다. 보이지 않는 손으로 생명을 다스리는 죽음처럼.


  소년은 그 ‘무(無)의 형상’ 앞에 가만히 선다. 유준은 죽은 아버지의 머리맡에서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을 바라본다. 그리고 소진은 그런 유준을 지켜본다. 또 한밤에 유준은 북쪽 방에 누워 있는 소진을 조용히 내려다본다. 소진은 어둠 속에서 자신을 응시하는 유준의 존재를 느끼지만 죽은 듯 꼼짝하지 않는다. 그렇게 아버지의 죽음이 소년에게로 전이된다. 두 아이는 죽음의 자궁 안에서 겪어야 하는 모든 것을 말없이 감내한 것이다.


  죽은 새를 땅에 묻고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며 죽음을 통과한 두 소년에겐 갑작스런 변화가 찾아온다. 새장을 들고 유준의 집에 왔던 노인에게 유준네 공장이 넘어가고 유준의 집이 이사를 하게 된 것이다. 유준이 그 집을 떠나면 자연히 소진도 그곳을 드나들 수 없게 된다. 이렇게 아버지가 사망하고 집이 몰락한 뒤에야, 죽어가던 것들이 완전히 종국을 맞이한 뒤에야, 유준과 소진은 죽음의 세계에서 벗어나게 된다.


  죽음의 자궁 밖으로 나온 이들은 더 이상 아이가 아니다. 죽음을 통과한 의식은 노인이 된다. 그래서 ‘소년이로’이다. 따뜻한 사랑이 있는 집에서 천천히 성장하는 것이 아니라, 차갑고 불안한 세계에서 생의 이면을 목도하며 순식간에 커버린 마음. 아무도 원치 않았을 혹독한 성인식을 치르고 너무 빨리 어른이 되어버린 소년들의 모습은 처량하다. 처량하다 못해 황량하다. 그런데 이것이 비단 그들만의 이야기일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소설 속 두 소년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거쳐야 하는 ‘통과의례’를 강렬하게 압축하여 겪어낸 것이다. 우리는 그들처럼 죽음의 자궁에 갇혀 있다. 어머니의 태에서 벗어나 세상에 나온 뒤에도 인간의 정신은 오랫동안 상징적 자궁 속에 머물러 있다. 부모가 물려준 삶의 태도와 생활 방식, 집안의 관습과 세계관 등을 그대로 답습한 채, 정신적으로는 아직 태어나지 않은 상태로 살고 있는 것이다.


  아기가 자궁 밖으로 나오지 않으면 죽는 것처럼 정신적 존재도 마찬가지다. 의식을 죽음으로 물들이는 상징적 자궁에서 벗어나야 진정한 자기 자신으로 살아갈 수 있다. 이는 두 소년이 겪은 것처럼 한 세계를 통렬하게 치러내고 한 시기를 완전히 끝막음하는 통과의례를 거쳐야만 가능하다. 정신적으로 한 존재가 태어날 때, 그는 부모나 집안에 의존돼 있던 유년의 자신과는 다른 존재가 된다. 소년에서 성년으로 거듭나는 것이다. 집이라는 기존 세계를 떠나는 소년들의 황량한 모습에서 희망의 빛이 엿보이는 건 이 때문이다.


  소설 전체를 지배하는 스산한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어린 나이에 짊어져야 했던 삶의 무게에도 불구하고, 소년들의 미래는 지금처럼 어둡지 않으리라는 생각을 갖게 된다. 남들보다 빨리 정신적 자궁에서 벗어났기에, 한 시대를 장례 치르고 죽어가는 세계와 작별했기에, 이 모든 어둠을 몸소 겪고 통과했기에, 그들은 제 발로 일어서서 자기만의 생을 일구는 법을 깨닫게 될 것이다.


  소년은 늙기 쉬워 유준과 소진은 한순간에 철이 들었지만 그것이 앞날을 살아가는 옹골진 힘이 될 것이다. 소년들의 마음 속 ‘노인’은 현명한 길잡이가 되어 그들이 삶의 걸음걸음을 신실히 걷도록 도와줄 것이다. 죽음의 자궁을 혹독하게 통과한 어리고 성숙한 마음을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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