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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태라 May 29. 2024

1일 1사

<월간에세이> 2024년 6월호 발표작

오늘은 무엇을 버릴까. 이렇게 물으며 집을 둘러본다. 그러면 버릴 것이 나온다. 휴지통 속 내용물이나 재활용품만이 아니다. 안 입는 옷, 오래된 가방, 묵은 화장품 등 하루에 하나씩은 꼭 버려진다. 물건만도 아니다. 버릴 것은 내면에도 있다. 찌뿌둥한 감정이나 잡스러운 생각 등. 마음속 쓰레기를 마음 밖 잡동사니에 실어 버린다. 하루에 하나씩, 매일같이 비우고 치운다. 이것이 일과가 된 지 오래다.


심플 혹은 미니멀 라이프라 한다. 물건을 버리고 공간을 살리는 생활. 비운 만큼 공간이 생기고 생기가 흐른다. 유형의 것이 사라진 곳엔 무형의 에너지가 차오른다. 그렇게 날마다 집이 넓어지고 밝아진다. 빈 공간은 빛과 여유의 자리다.

 

내가 사는 아파트는 9할 이상 비어 있다. 35평 공간에 소파도, 식탁도, 옷장도 없다. 사계절 옷은 드레스룸에 전부 들어가고 남는다. 침실엔 침대 하나, 거실엔 탁자 하나, 작업실엔 책상 하나만 놓여 있다. 불필요한 물건은 거의 없고 모든 곳에 여백이 넘친다. 단 한 군데만 빼고.


빈틈없이 채워진 유일한 방이 있다. 바로 서재다. 이 방은 삼면이 서가로 둘러싸여 있다. 서가의 칸칸에는 책들이 빽빽이 꽂혀 있다. 책만이 아니다. 한쪽 벽면을 장식한 음반도 있다. 록 음악에서 클래식까지, 십 대 시절부터 모은 음반들이 먼지 속에서 잠자고 있었다. 문득 이 방의 모양새가 기이하게 느껴졌다. 날마다 물건을 버리면서 이 골동품들은 왜 그대로 두었을까.

 

애장품이라 생각해서였을 것이다. 십수 년 전 즐겨 들었던 음반 몇 장을 재생했다. 그러나 모두 얼마 듣지 못하고 끄게 되었다. 너무 거칠거나 시끄러웠다. 혹은 지루하거나 느끼했다. 사람이 이렇게 변한다. 존재가 변한 만큼 공간도 달라져야 하는데, 골동품에 점령된 그 방은 고인 물처럼 과거에 머물러 있었다.


고인 물을 빼내기로 했다. 이백여 장의 음반과 삼백여 권의 책이 서가에서 빠져나왔다. 누렇게 변색한 책 속에서 문장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대학 시절 읽었던 『생의 한가운데』 구절이다. “나는 내 삶에서 한 짐이 덜어진 것이 기뻤던 거야.” 나와 닮은 주인공의 말에 밑줄 치며 읽었던 이 책도 버렸다. 짐이 덜어진 것에 기쁨을 느끼며.


책과 음반을 하나씩 정리하며 ‘1일 1사(捨)’라는 말을 생각했다. 하루에 한 가지 버리기. 날마다 배변을 하듯 버리는 일을 생활화하는 것이다. 눈에 보이는 잡동사니도 좋고 마음속 쓰레기도 좋다. 하루에 하나씩, 비운 만큼 존재가 살아난다. 묵은 것을 버리면 새것이 생기고 죽은 것을 치우면 생명이 흐른다. 버림, 비움, 끊음을 통해 날마다 공간이 확장되고 의식이 깨어나고 심신이 가벼워진다.


그래서인지 나는 동안이란 말을 많이 듣는다. 사람들은 내 나이를 스무 살쯤 적게 본다. 지금껏 병원 신세를 져본 일도 없다. 코로나도 피해 간 건강한 몸과 생기 넘치는 생활의 비결을 1일 1사에 돌려도 좋을 것이다. 버리고 비우고 끊는 행위를 통해 새로운 에너지가 부단히 흘러들기 때문이다. 생명력의 원활한 흐름, 이것이야말로 젊음과 건강과 풍요의 마스터키인 것이다.


그 열쇠는 누구나 가질 수 있다. 오늘은 무얼 버릴까. 이 물음으로 하루를 시작해보자. 마음에 여유가 생기는 것을 느낄 것이다. 없는 것을 갖는 데 집중했던 의식이 있는 것을 버리는 쪽으로 전환되면 저절로 가진 자가 된다. 가진 자만이 버릴 수 있다. 


버리면 얻게 된다. 실제로 버리자마자 돈이 생겼다. 책과 음반을 중고로 넘기니 한 달 생활비가 나왔다. 이렇듯 비우면 채워진다. 채워지니 넘쳐흐른다. 그렇게 삶이 풍요로워진다. 나날이 새봄처럼 싱싱해진다. 1일 1사의 힘이다.


김태라 l 소설가

「1일 1사」가 실린 <월간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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