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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태라 May 17. 2024

고수와 하수

<신의 한 수: 귀수편>의 귀수와 황덕용

근래 집을 많이 보러 다녔다. 작가(作家)는 집 짓는 자다. 작가의 일과 비슷한 것이 바둑이다. 지난주 대학 강의에서 <신의 한 수: 귀수편> 얘기를 했는데 이 영화엔 두 종류의 인물이 나온다. 제 능력을 가지고 욕망의 집을 채우는 자와 그것 비우는 자. 그런데 승승장구했던 전자들이 비움의 고수(귀수)를 만나 하나같이 자멸한다.


귀신 같은 수법으로 패자들의 손을 잘랐던 무당은 귀수에게 무너져 제 손을 자른다. 남의 생명을 짓밟던 깡패 잡초는 귀수에게 속패해 목숨을 구걸한다. 뒤틀린 복수를 시도했던 외톨이는 귀수에게 덤비다 죽게 된다. 그리고 귀수의 숙적 황덕용, 욕망의 화신인 그는 스스로 죽음의 길로 나아간다. 자신이 놓은 흑돌이 ‘死(죽을 사)’를 그리고 있는데도 이를 모른다.

죽기 직전 귀수에게 “첫 수부터 마지막 수까지 네가 다 계획한 건가?”라고 묻지만 귀수는 대답하지 않는다. 인간의 계획이 아니라 전부 신의 손바닥 안에서 일어난 일. 잠든 눈으로는 볼 수 없다. 욕망은 의식을 잠들게 한다. 의식의 잠은 작은 죽음이다. 그 작은 죽음이 쌓여 큰 잠(사망)을 낳는다. 자기가 어떻게 죽는지도 모르는 것, 그게 “하수의 운명”이라고 귀수는 말한다.


고수의 운명―생사의 바둑판은 그의 손바닥 위에 있다.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계획이라도 한 듯 만사는 그의 의식 안에서 일어난다. 고수는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모든 것을 한다. 그저 바둑돌을 옮길 뿐이지만 그가 지나간 길엔 법도가 들어선다. 썩은 것은 베어지고 은 것은 죽는다.

큰 변화의 시기, 집이 바뀌는 때. 집 짓기의 고수인 동시에 집을 초월한 귀수를 보며 떠오른 구절: “주께서 집을 짓지 아니하면 집 짓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시편). 하수는 헛된 수고를 하는 반면 고수는 수고 없이 집을 짓는다. 그를 통해 신이 일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활을 가르는 ‘신의 한 수’는 황덕용이 아니라 귀수에게서 나온다. 비운 자, 위에 있는 자, 고수를 통해서.


바둑과 창작의 본질은 비움에 있다. 비우면서 지어지는 집, 지으면서 비워지는 집. 그 집주인을 作家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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