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가장 큰 위험은 목표를 너무 높게 잡아 이를 달성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목표를 너무 낮게 잡아 이를 쉽게 달성하는 것이다.
―미켈란젤로
사람들이 인생에서 실패하는 건 그들이 목표를 너무 높게 잡아서가 아니라 너무 낮게 잡기 때문이다.
―레스 브라운
<타임 패러독스>로 영화화된 R. 하인라인의 소설 「그대들은 모두 좀비」의 주인공은 자기 자신과 관계해 자기 자신을 낳은 존재이다. ‘시간여행’이라는 SF 장치를 통해 이 놀라운 설정이 형상화됐는데, 그 줄거리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여자로 태어난 제인은 성인이 된 뒤 남자로 성전환되어 존이 되고, 존은 과거로 돌아가 여자였던 자신(제인)과 관계를 맺어 아이가 태어나는데 그 아이가 바로 제인이다. 기이한 이야기지만 SF이기에 가능한 이 작품이 존재의 비의를 탁월하게 그려냈다고 생각한다.
나는 나와 결합해 나를 낳는다. 즉, 현재(여자 제인)와 미래(남자 제인)의 결합이 바로 과거(아기 제인)이다. 그런데 이 ‘과거’는 결합의 ‘결과’이기에 시간상 현재보다 뒤에 있다. 그렇다면 과거는 곧 미래가 된다. 과거가 미래라면 현재라는 장(場)은 과거와 미래를 포섭한다. 결국 과거-현재-미래가 한 묶음이 된다.
목표에 대한 글을 시간 이야기로 시작한 이유는 이러하다: 우리가 <미래>에 달성할 목표는 사실 <과거>의 것이다. 그것은 우리의 현재보다, 심지어 우리의 존재보다 앞서 있다. ‘소명’이나 ‘천명’ 같은 단어가 이를 잘 보여준다.
위 인용구에서 ‘잡는다’라는 동사로 연결된 ‘인간’과 ‘목표’ 중 실제 주어는 ‘목표’이다. 인간이 목표를 잡는 것이 아니라 목표가 인간을 잡고 있다. 존재는 그것에 ‘잡혀’ 있다. 잡혀 있는 그것으로부터 존재의 탄생이 있고 삶은 그것으로부터 펼쳐진다.
이는 인용구의 ‘높은’ 목표에 해당한다. 높은 목표란 본래면목의 개현을 뜻한다. 반대로 낮은 목표란 한계의식에 갇힌 에고의 욕망이다. 이는 본래의 나를 향해 성장하고 있는, 깨져야 하는 알 같은 것이다. 따라서 ‘높은’ 목표를 외면하고 작은 욕망에 따라 목표를 ‘낮게’ 잡아버리면 작은 육화의 한계에 갇혀버릴 수 있기에 “인생에서 실패”까지 할 수 있는 “가장 큰 위험”이 되는 것이다.
인생의 목표는 ‘과거인 미래’에 이미 실현되어 있다. 그것이 실현돼 있는 것이 아니라면 애당초 의식에 나타나지 않는다. 그에 대해 생각조차 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생각이라는 현재의 ‘씨앗’은 그것이 개화된 미래의 ‘꽃’으로부터 온다. 바꿔 말하면, 씨앗 속에는 이미 꽃이 내재해 있다. 흙빛의 씨앗에서 원색의 꽃을 보는 것이 직관이고 통찰이다. 곧바로 꿰뚫어 보니, 미래의 정원에 핀 꽃향기가 지금 내 안에 가득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