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아르코 문학창작기금 선정작, 단편소설
둘째 날, 하루토 상이 다시 왔다. 부스 안으로 들어온 그는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사장과 마주 앉았다. 가방에서 꺼낸 노트의 가름끈을 들어 펼친 곳에는 단정한 손 글씨로 쓴 한자와 히라가나가 보였다. 부스 앞에서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눈길을 주면서도 두 사람의 대화에 귀를 열어 놓았다.
“사람을, 산속 깊은 곳이나 외딴섬처럼 외진 곳 말이에요. 복잡한 도시도 마찬가지고요. 이 정도 기술이라면, 아무튼 낯선 데서 길을 잃은 사람도 찾을 수가 있을 것 같군요.”
“찾는 사람이 있으세요?”
평소라면 기술적인 얘기로 접근했을 사장은 질문 의도를 더 정확히 파악하려는 듯했다.
“이 주파수가 벽 같은 장애물을 넘어서 멀리까지 안정적으로 간다면 말이죠. 센서를 부착한 간단한 기기만으로 조난구조기를 만들 수 있지 않겠어요?”
“어떤 방식으로 구현하는 것이 가장 적합한지 고민할 수 있지만 가능하긴 해요. 인명 구조에는 골든타임도 중요하지만, 상황에 따라 조난자나 구조자 모두 오래 버티고 포기하지 않는 시간도 중요할 테니까요. 물이나 비, 충격에도 성능이 발휘될 내구성도 필요할 거고요.”
“그래서 말입니다. 이 회사 기술은 조난 구조 제품을 만드는 데 적합해 보입니다.”
그가 제안한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제품을 구상 중인 사장은 내년에는 그런 제품을 들고 올 수 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민서는 노인이 어느 날 갑자기 길을 잃을 것을 염려하거나 배우자가 이미 몇 번쯤 길을 잃었을지도 모른다고 추측했다.
셋째 날까지 예상보다 많은 사람이 다녀갔다. 사장과 민서 그리고 통역 셋이 많은 방문객을 감당했다. 이제 전시회는 하루 남았으나 기대하고 애쓴 것과 달리 딱히 눈에 보이는 성과는 없었다. 물론 시간을 두고 성사해야 하는 일들이 있고, 회사를 알리고 홍보하는 것도 의미가 있다. 하지만 이대로 회사로 복귀한다면 달라질 것이 없다. 부족한 자금으로 버틸 시간이 별로 길지 않았다.
폐장을 알리는 음악이 나왔다. 사장은 거치대에 있는 브로슈어 정리대를 부스 안쪽으로 들여놓았다. 테이블 위에 제품을 정리하면서 민서가 말했다.
“힘내라 노인이 오지 않을 건가 봐요.”
점심을 먹지 못한 사장이 빨대로 팩에 든 우유를 마시며 민서를 보았다. 팩이 오므라드는 소리가 났다.
“김 팀장님, 그 노인에게 뭐라도 기대하고 계신 거예요?”
“기술도 아는 것 같고, 신제품 제안도 했잖아요.”
사장이 힘없이 웃었다.
“혹시 그분 소속이 어딘지 아세요?”
사장도 그와 미팅하면서 명함을 챙겼을 텐데 왜 확인하지 않았을까. 이미 그의 명함을 살펴보았고 별로 연관이 없다고 판단했을까. 그렇더라도 민서는 호텔로 돌아가면 노인의 회사를 검색해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명함에 적힌 직함은 기술이사였으나 회사는 민서가 모르는 곳이었다.
사장은 캐리어에 제품을 넣으면서 통역과 민서에게 저녁을 먹자고 했다. 첫날은 통역이 개인적인 일이 있다는 이유로, 둘째 날은 사장이 중소기업진흥공단과 연계된 일본 진출 한국기업 실무자와 저녁 약속이 있다는 이유로 함께 저녁을 먹지 못했다. 회사에서 투입된 인원이 적어 통역이 고생하는 것을 사장이 모를 리 없고, 통역은 좋든 싫든 회사 사람들과 한번은 밥을 먹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는 듯했다. 사장은 제품이 든 캐리어를 다시 테이블 아래로 밀어 넣으며, 갑시다 하고 앞장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