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왜 네 손목을 잡고 울어야 했을까?

자해에서 살아남기

by 김교사
사진: Unsplash의Francesco Ungaro


교실에서 처음 그 학생을 만났을 때, 나는 단지 마음이 조금 힘든 아이를 맡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학기가 시작되고 몇 주가 지나자 내가 너무 어리석었다는 걸 깨달았다. 아이는 하루가 멀다 하고 손목에 자해를 하고는 나를 찾아와 상처를 보여줬다. '내일은 하지 말자' 함께 다짐해도 소용없었다.



그 아이는 자해를 반복했고 나는 아이의 심리적 어려움을 이해하려 했다. 하지만 그와 대화해 보면 자해는 그저 상처 내는 행위, 스스로를 해하는 행위가 아니었다. 이는 오히려 삶을 견디고자 하는 몸부림이고, 누구에게도 말하기 힘든 고통을 잠재우려는 시도로 보였다.



아이는 왜 그렇게 내게 와서 자신의 상처를 보여줬을까? 아마도 그는 무수한 자해의 순간들 속에서 내가 그를 이해할 거라는 희망을 품고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그 학생은 결국, 자해를 해결하지 못한 채 졸업을 맞이했다.



당시 나도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지만 초보 교사였기에 이 학생을 대하는데 미흡했던 점이 있는 것 같다. 만약 그때로 돌아간다면, 아래 이야기를 해주고 싶다.



네 잘못이 아니야

죽음을 목적으로 하지는 않으나, 본인이 가진 수많은 부정적 감정을 해소하기 위한 수단으로 자해를 선택하는 경우를 전문용어로 '비 자살성 자해'라고 부른다. 이런 경우 자해의 횟수는 많으면 수백 번에 이르는데, 이 학생이 그랬다.

누군가는 "자해를 수백 번 하고도 못 끊는다고?"라고 쉽게 말할 것이다. 그런데 비 자살성 자해는 단순히 당사자의 의지 부족이나 성격 문제로 설명할 수 없다. 이건 차라리 우리 몸이 자신의 고통을 무언으로 외치는 구조 신호로 해석되어야 하리라. "내가 지금 너무 아파. 구해줘"라고 말이다. 스스로에게 상처를 내는 그 행동이 너무 싫다고 말했던 그 아이. 그럼에도 다음날이면 어김없이 또 다른 자해를 하고 왔던 아이. 사실은 본인도 그런 자신이 너무 힘들었을 것이다. 그때로 돌아간다면 이렇게 말하고 싶다.


"그건 네 잘못이 아니야."


몸과 마음이 소통하는 방식은 개인마다 모두 다르다. 누군가는 괴로울 때 소리를 지르고, 또 어떤 이는 힘들 때 말수가 줄고 자신만의 동굴 속으로 들어간다. 다만 이 학생과 같은 경우 고통의 표현이 이런 방식에 닿았을 뿐이다. "아이야, 네가 선택한 게 아니라, 네 몸이 그 길로 들어섰을 뿐이야. 그러니 스스로를 미워하지 말렴."



느려도 괜찮아

매일 같이 나에게 “선생님, 오늘은 안 할게요"라고 했던 그 아이. 그러고는 실패를 할 때마다 스스로를 더 미워하게 됐다. 나조차도 '오늘은 괜찮겠지'라고 기대하고 또 실망하였으니, 뭐라 할 말이 있으랴. 아마도 실망한 표정이 아이에게도 다 보였을 것이다. 사실 아이에게 필요한 건 실패해도 다음에 다시 해볼 수 있는 용기였을 텐데 말이다.


완벽하게 멈추려고 하지 않아도 괜찮다. 대신 자해가 하고 싶을 때, 자해가 아닌 다른 습관을 가지려 노력해 보자. 가령, 자해 대신에 손에 고무줄을 끼우고 팔이 빨갛게 될 때까지 튕긴다던가 하는 식으로 말이다. 그러다가 결국 또 실패하게 된다 하더라도, 중요한 건 자해로 향하려던 자신을 짧은 시간이라도 막아보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조금씩 조금씩 강도를 낮춰보자. 한 번도 안 한 날보다, 조금이라도 덜 한 날이 의미가 있다.



네가 외롭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 아이가 졸업한 이후 나는 종종 생각한다. "내가 뭘 더 해줄 수 있었을까?" "지금은 편안해졌을까?" 하고. 그땐 나도 어려서 학생을 품는 그릇이 작았던 것 같다. 지금이라면 더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었을 텐데, 더 많은 시간을 내어줄 수 있을 텐데. 그중에서 이 학생이 내게 남긴 가장 큰 가르침은 이해하기 어려운 문제라도 받아들이고 수용해야 한다는 점이었다.

비자발성 자해와 같은 문제를 겪는 이들은 사회적으로 외면당하고 고립되기 쉽다. 심지어 가장 가까운 부모조차도 자신의 자녀를 이해하지 못하고 종종 이들을 비난하게 된다. 그렇지만, 과연 이런 식으로 어떤 문제가 해결될 수 있을까? 이 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가정, 학교, 사회 모두가 자신의 위치에서 이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야 한다. 그들이 믿을 수 있는 사람, 기댈 수 있는 사람이 되어주자. 아이가 더욱 소외되지 않도록.



우리 사회가 네 버팀목이 될 수 있을까?

사실 학교엔 자해 문제를 겪는 학생들의 숫자가 상당하다. 이 아이들이 졸업하면 성인이 되니, 분명 우리 주변에도 자해로 힘든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이 많으리라. 그런데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은 자해하는 지인을 한 명이라도 알고 있는가? 왜 이들은 주변에 자신의 어려움을 숨기고 말까? 아마도 그건 이 사회가 "네가 더 강해져야지" "마음 단단히 먹어" "너만 힘든 게 아닌데 대체 왜 그래?"라고 이들의 입을 틀어막아서가 아닐까.

앞으로는 세상이 이들에게 좀 더 따뜻한 곳이 되기를 희망한다. 소매를 걷으면 무수한 상처가 있는 사람이 창피한 얼굴 표정을 짓는 게 아니라, 평안한 얼굴로 아래처럼 말할 수 있는 사회가 되기를 바란다.

"나는 힘들 날이 있었어, 그렇지만 지금은 그날을 지나왔어."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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