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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탱글통글 Mar 14. 2018

소소한 일기 (2월)

금방 지울 일기

1. 나는 아기를 조심스럽게 받아 안았다. 아기가 너무 조그마해서 웃음이 나왔다. 품 안의 아기가 나를 따라서 배시시 웃었다. 나는 그때 직감했다. 삶은 순환하고 있음을. 나에게 남은 시간은 보잘것없이 끝을 향해 흐르고, 아이의 시간은 앞으로 나아가겠지. 별로 슬프진 않았다. 그냥 지구가 그런 거니까.



2. 나는 우주에 혼자 있었다. 별 위를 걷다 보면 드문드문 나와 같이 외롭게 걸어가는 사람들이 있다.



3. 저녁에 집에 가는데 차의 조명에 생긴 그림자가 고양이처럼 지나갔다. 다들 그렇게 내 곁을 조용히 지나간다.



4. 흑인음악 동아리에 흑인은 없다. 수원에 없는 수원 원조 갈비는 모두 서울 성동구에 있다. 원하는 것은 항상 그곳에 없다.



5. 나는 내가 가끔 우울한 건지 심심한 건지 헷갈릴 때가 있다.



6. 이월의 달빛은 아직 차다. 너무 추워서 눈물이 났는데 친구가 왜 우냐고 물어봐서 애써 웃었다.



7. 죽은 친구의 카카오톡 프로필 글귀는 living hope 였다. 그렇게 힘들게 살아놓고 그딴 말을 남기고 갔다. 희망을 가지고 살라는 말이 너무 힘들다. 자꾸 기대하게 된다. 친구를 지울 수가 없다.



8. 돈이란 게 참 우스워.. 돈이 없었던 어릴 때는 몇 시간이고 고민하면서 선물을 골랐는데. 그때는 그 사람의 웃는 얼굴을 좀 더 떠올렸던 것 같은데. 요즘은 아무 매장에 들어가선 그럴듯하게 비싼 것을 아무 생각 없이 집을 뿐이야. 선물은 더 고급스러워졌지만 마음은 점점 가벼워졌는데 너는 더 좋아하니까 헷갈려.



9. 나무를 키울 때 첫 꽃은 때어내야 한다. 아직은 더 자라야 할 때니까. 뿌리를 내리고 굵어져야 한다. 나는 그게 싫어서 때지 않고 몰래 감춰두었다. 그래서 뿌리가 좀 흔들리는 중이다.



10. 기적은 있다. 나에겐 언제나 개 같은 일만 기적적으로 일어난다는 게 문제지만. 그러니까 기적 따위는 일어나지 않고 제발 하얗고 조용한 삶이 이어지기를 매일 기도한다.



11. 산책을 좋아한다. 발이 아플 때까지 걷는다. 떠나 온 곳에서 멀어질 때마다 상처로부터 점점 멀어지는 느낌이 든다. 그리고 점점 멀어질수록 슬픔의 구멍이 나에게 얼마나 깊은지, 그리고 다른 모두에게는 얼마나 보잘것없지를 낀다. 지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의 단풍나무는 항상 그 자리에 있다. 그리고 나도 언제나 그 자리로 돌아가야만 했다.



12. 욕먹을 각오로 고백하자면, 요즘 돌아다니는 위로글 따위 좋아하지 않는다. 위로는 너무나 어렵다. 나는 삶은 계란을 싫어하지만 으깬 계란은 좋아한다. 토마토는 싫은데 케첩은 좋다. 나도 나를 모르겠는데 어쭙잖게 위로한답시고 '힘내요. 당신은 소중한 사람이에요'라고 노골적으로 떠드는 글 따위 구역질 난다. 위로해줄 테니까 날 사랑해줘요. 돈 줘요.라고 말하는 것 같다. 그런 책 살 돈으로 생크림 케이크나 사 먹는 게 더 행복해진다. 그냥 위로 따위 하나도 하지 않는 글이 좋다. 그냥 자기 하고 싶은 말 하고 감정이 적나라하게 드러난 글이 좋다. 위로는 내가 알아서 주섬주섬 챙겨가면 된다. 이유는 모르겠는데 나는 그렇다.


비나 좀 왔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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