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 그리고 암환자를 마치며
안녕하세요. 김탱글...통글입니다... 후.. 이 닉네임은 도저히 익숙해지지가 않네요.
올해 처음으로 바닥에 떨어진 낙엽을 본 날, 저는 짬뽕을 먹으러 갔습니다. 너무 매운 음식은 잘 못 먹는 저에게 적당히 맵고, 면 위에 해산물과 야채를 듬뿍 올려주기에 종종 찾아가는 단골집입니다.
생각해보면 불과 2년 전 만해도 상처로 망가진 얼굴 때문에 친구들과 음식점을 가는 것조차도 마음이 불편했었는데, 지금은 뻔뻔스러울 정도로 혼자 먹는 것도 해내는 것을 보면 세상에 영원히 익숙해지지 않는 일은 없나 봅니다.
음식점에 도착해 짬뽕과 군만두 세트를 시키고 셀프코너에서 단무지와 양파를 담았습니다. 춘장은 비싸다는 말을 들어서 특히 더 신중하게 담을 양을 계산했습니다. 리필이 가능하다고 잔뜩 담고서 남겨버리는 어른만큼은 되고 싶지 않거든요.
잠시 후, 군만두가 먼저 나왔습니다. 이 집의 군만두는 피가 과자처럼 바삭해, 한입 배어 물면 '아사삭' 하며 부스러지는데다 뒤이어 촉촉한 만두소가 만두피와 입속에서 부드럽게 뒤섞이며 내는 맛이 일품이죠.
한 개 반 정도를 먹고 있을 때, 짬뽕이 나왔고 저는 꽤나 들떠 있었습니다. 눈은 풍성한 짬뽕의 양에 즐겁고 군만두 덕분에 입도 행복하고 가게의 스피커에서는 밝은 목소리의 라디오 dj가 시청자와 OX 퀴즈를 진행 중이었으니까요.
그런데 살짝 식히기 위해 성급히 면발을 한 젓가락 집어 올리자 홍합의 바다향이 코를 훅 찌르며 들어왔고 동시에, 저는 끝도없는 자괴감에 빠져버렸습니다.
네.. 글을 쓰면서 읽어봐도 참 어이가 없네요. 짬뽕의 홍합과 자괴감, 마치 '양배추'와 '플로피 디스크' 만큼의 엉뚱한 조합이라고 생각합니다.
아이러니하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눈, 귀, 입 모두 즐거운 상황에서 평소 가스 냄새도 잘 못 맡을 정도의 둔감한 후각 때문에 갑작스레 이렇게 되어버린다는 사실이 참.
원인이야 어찌 되었든 터진 둑처럼 쏟아져 들어오는 자괴감으로 저는 패닉 상태에 빠졌고 금세 가득 고인 눈물이 뚝뚝 떨어지는 바람에 크게 당황했지만 다행히 재빨리 수습해서 주인 내외분께 들킨 것 같지는 않았습니다. 단골집을 잃어버릴 뻔했는데 그 점은 참 다행이네요.
먹는 둥 마는 둥 급하게 짬뽕집을 나오면서 사태의 원인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홍합의 바다향이 나도 모르는 깊은 감수성을 자극했나?'
'29살이나 먹고 아무것도 이룬 것이 없기 때문일까?'
'툭하면 아픈 몸 때문에 단기 알바조차도 쉽게 못 구해서 이러나?'
위에 적혀있는 이유 외에도 정말 수많은 생각들을 해 보았지만, 사실 저는 지금까지도 끊임없이 계속되는 자괴감과 외로움의 원인을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온갖 시련들을 비교적 담담한 표정으로 견디어 온 제가 고작 짬뽕의 홍합 냄새 때문에 속이 비어있는 조개껍데기가 되어버렸다 말한다면 주변의 모두가 믿지 않을 것이 분명합니다.
'또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특유의 지랄병이 도졌구먼..'이라고 생각할 것이 뻔하죠. 물론 평소에 제가 좀 지랄 맞았단 것을 인정하긴 합니다만.
하지만 이번이 여느 때와 다른점은 겉으로는 정말 아무렇지도 않게 지냈다는 것입니다. 아니, 오히려 약간 명랑해 보였을지도...
속은 텅 비어있는데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듯 행동할 수 있으니 오히려 더 불안해졌습니다.
결국 그렇게 몇주를 조개껍데기로 살다가 중요한 일정도 엉망으로 만들어 버린 채 지금 저의 머릿속은 무기력과 공허함만으로 가득 차게 되어버렸죠.
그리고 어제 아침, 우연히 화장실에서 거울로 저를 멍하니 바라보았는데, 웬 얼빠진 돼지 한 마리가 서 있더라고요.
'하... 나야 어찌 살아도 상관없긴 하지만 주변 사람들은 무슨 죄야?'라는 생각이 퍼뜩 들었고 하루빨리 나란 놈을 수습해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그래서 우선, 그날 저녁 '내가 하고 싶은 일'에 대한 리스트를 써 보았습니다. 솔직히 저는 막힘없이 80개 정도는 술술 써 내려갈 줄 알았는데 10개 정도를 쓰고 버벅거리다가 결국 13번 '로또 당첨'을 어거지로 끼워넣고서 리스트를 마무리했습니다.
앞으로 1년, 저는 이 리스트를 다 이뤄내 볼 생각입니다. 뭐 2~3개 정도는 절대 안 될 것 같은 소원도 있지만 그래도 나머지 10개 정도는 열심히 노력한다면 다행히 어느 정도 가능성이 있는 것들이거든요.
열심히 노력해서 이 자괴감과 허무함에 대한 제 나름대로의 결론을 얻어보려고 합니다. 좀 오글거리기도 하고 이런 일은 좀 진작에 끝냈어야 하는데.. 싶지만 어쩌다 보니 지금 이러고 있네요.
암 투병 생활을 하면서부터 이미 남들보다 늦어버린 것, 이왕 이렇게 된 김에 1년 동안 제 행복에 대해 확실하게 집고 넘어갈 생각입니다. 전 정말이지 진심으로 행복하게 살고 싶거든요...
그래서 아직 이름은 정하지 않았지만 앞으로는 새로운 매거진으로 찾아 뵐 계획입니다. 바빠질터라 글 형식도 좀 더 짧고 간략하고 지극히 일상적인 것들로 바꿀 예정이라서요.(물론 여태까지 특별한걸 써온 것은 아니지만)
일년간의 리스트를 향한 여정들은 따로 모아 1년 뒤에 역어 발행할 생각입니다. 벌써부터 쓸거리들이 넘처나네요.
이렇게 저의 '20대 암환자의 인생 표류기'는 끝이 납니다. 이별은 새로운 만남의 시작이라더니.. 이제 20대도, 암환자와도 작별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이런 일들이 생기네요.
브런치라는 소통 창구를 만나서 독자님들을 알게 된 것은 큰 힘이 됩니다. 저 같은 사람이 쓴 글을 공유할 수도 있고 독자분들도 알게되고 피드백도 얻는다는 사실이 정말 정말 정말 즐겁네요.
앞으로 시작되는 소소하지만 치열하게 행복을 찾아가는 30살 민간인의 이야기도 잘 부탁드립니다. 최대한 열심히 올려보도록 노력하겠습니다.
항상 부족한 글 읽어주셔서 정말이지 너무나 감사합니다. 그리고 사랑합니다. 전 인류애적인 느낌으로 말이죠.
김탱글통글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