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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탱글통글 Oct 20. 2016

역시 말랑말랑한 것이 좋아


 고백하자면, 몇 달 전부터 자발적으로 멀티 비타민을 챙겨 먹고 있다.


 자그마한 크기 속에 비타민 C와 D는 물론, 덕분에 이런 물질이 내 몸에 있다는 걸 알게 된 영양분들까지 잔뜩 담고 있는 인류 과학문명의 열매를.

 

 이름도 어렸을 적 히어로물에서나 몇 번 듣고 다시는 볼 일이 없을 줄 알았던 무려 '메가 울트라 골드'라는 단어가 붙어있는 녀석이다. 

 


'Mega Ultra Gold'



 "뭬가, 울투롸, 고오오ㄹ오올드~"



 약병을 손에 쥔 채로 따라 읽으면 어쩐지 힘이 솟아나는 것 같기도 하다.



 병원을 퇴원하며 더 이상 알약은 거들떠도 안보리라 다짐했지만, 하루하루 고달프고 피로해지는 것이 몸으로 느껴지니까 어쩔 수 없이 다시 찾게 되었다. 

 물론 근육을 만들고 식단을 건강하게 하면 알약 따위 없이도 확실하게 해결될 문제지만, 그런 건 어쩐지 바쁜 현대를 살아가는 얼반시크한 도시인에게 어울리지 않는다.

 무심한 듯 아리수를 따르고 비둘기처럼 목을 젖히며 알약을 삼키고서, 덩어리가 목을 걸고 넘어가는 불쾌함에 몸을 부르르 떨어주어야 한다.



얼반...그리고 슄크...



 인간은(사실 나는) 어쩔 수 없이 그런 존다.


 에피쿠로스의 말마따나 더 큰 행복을 위해서는 약간의 고통을 기꺼이 감내하는 동물.


 끔찍하게 싫으면서도 돈 때문에 회사를 출근하는 것처럼, 나 또한 소름 끼치게  알약이 싫지만 게으른 활력을 위해 억지로 삼킨다.






 하지만 스스로 알약을 챙겨 먹는 것보다 더 어처구니없는 것은, 오로지 맛으로만 먹었던 소위 보양식들(삼계탕, 장어, 오리 수제비 등등)을 먹고 나면 게임 캐릭터의 에너지바처럼 내 안의 무언가가 쭉 차오르는 게 느껴진다는 것이다.


 그 '무언가'는 이제 나도 건강을 보조하는 것들에게 도움이 필요하단 빼고 박도 못하는 증거인 셈.

 

 물론 도움이 필요하다면 의지하는 것이 나쁜 건 아니면서도 얼마 전 결국 홍삼액마저 손을 대기 시작했을 때는 약간 씁쓸한 마음이 들었다.



 


 조금만 움직여도 활력이 쭉쭉  빠져나가는 것이 느껴졌기에 어머니가 부엌 첫째 서랍에 넣어둔 홍삼액을 야금야금 복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제 더 이상 '메가 울트라 골드'만으로는 나의 활력을 보조할 수 없을 만큼 부쩍 연비가 떨어졌다.

 고급 세단이 되어가는 중이라고 스스로를 위로하고 있지만, 어쩌면 그저 똥차가 된 것일 수도 있고.



 나도 이제 홍삼을 쭈압쭈압 거리 빨아먹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길쭉한 포의 끝을 자르고 입으로 '추르르즈잡'하고 빨아들인 뒤 검지와 중지를 이용해서 마지막 한 방울도 놓치지 않고 게걸스레 뽑아먹는다.


 건강보조식 따위 먹는 남자는 쿨하지 못하다고 생각했는데..


 "건강보조식이 뭐 어때서? 나는 고등학교 때도 먹었는데?"라고 말하실 수도 있겠지만, 인생에 있어서 보조제가 필요한 만큼 열정적이던 적이 없었기 때문에 이런 현상들이 대단히 낯설고 당황스럽다.

 심지어 지금도 그저 일상생활 정도의 수준이 벅찰 뿐다.

 딱히 세상을 이롭게하는 대단한 일을 하는 것도 아닌데 이 정도로 힘든 것은 어쩐지 부끄럽달까.






 이제 나도 몇 달만 있으면 서른이다.



"아직 생일 안 지났어요"


"미쿡나이로는 28이에요" 같은 애처로운 변명을 늘어놓을 수 있는, 청년과 아저씨의 경계선을 기웃거리는 허가증을 받는 나이.

 이제부터 관리와 노력의 정도가 그 경계선을 넘나드는 기준이 되겠지만, 세안 후 로션을 바르는 것조차 귀찮아하는 나로서는 이미 전의를 상실한 지 오래다.

 뭐... 아저씨라 부를 테면 그러라지.. 흥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뭘까?

 이제는 조금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때가 온 것이다.


 늙는다는 것은 이전에 비해 무언가가 변하거나 혹은 딱딱하게 굳어지는 과정이 아닌가 싶다.


 나도 요즘 들어 달라지고 있는 몇 가지 징후를 느낄 때가 있기는 하다.


1. 과자봉지를 가위로 잘라 열고 뿌듯해한다거나


2. 요리 과정이 담긴 유투브 동영상 구독하기(각각의 재료가 썰릴 때 나는 소리를 좋아한다)


3. 최악은, 요즘따라 혼잣말을 하는 횟수가 늘어나기 시작하더니 자연스럽게 말에 운율까지 넣기 시작한다는 것



 사실 이렇게 '변화하는' 것들이야 웃어넘길 수 있더라도, 경계해야 할 것은 점차 '굳어지는' 어떠한 것들이다.


'생일은 무조건 생크림 케이크'


'감자튀김은 무조건 햄버거를 다 먹은 후'

 

 하루 한잔 마시는 아메리카노 대신 딸기 바나나라도 사 마실라치면 며칠을 고민하며 마음을 다잡아야 한다.


 이런 습관무럭무럭 자라나 '꼰대'가 되어버리는 씨이다.

 점점 경험이 주는 틀이 익숙하고 편안해지다가, 나중에는 오직 그 틀에 갇혀 세상을 마주하다 보면 어느덧 자라난 덩굴에 온몸이 휘감겨 영락없는 '꼰대'가 되어버릴 것이다.


 나에게 꼰대라 함은 좁은 길목에서 당당하게 담배를 피우며 걸어가는 아저씨들다. '담배를 길에서 피우는 게 어때서? 예전에는 다들 그랬는데?'라는 고정관념이 굳어져버린 사람.

요즘이 얼마나 달라진 세상인데..



 물론 세상에는 온갖 종류의 진상들이 있겠지만 코 부근에 암이 발병했던 나로서는 피할 수도 없이 좁은 길거리에서 담배를 뻑뻑 피우는 아저씨들을 만나면 유독 분노로 머리카락이 쭈뼛쭈뼛 솟아오른다.



빡쳐..



 하지만 무작정 그들과 투닥거릴 수는 없다.

 코에 갈비뼈를 박고 볼에 실리콘을 심었기 때문에 항상 조심해야 하니까. 

 그래서 분노를 해소하는 대처방법 이라기는 뭣하지만 병실에서 다년간 축적한 데이터베이스와 상상력을 이용해서 그 사람을 저주하고는 한다.

예를 들자면 이런 식이다.




"확 폐암이나 걸려버려라.. 더러운 성질머리 때문에 아무도 병문안을 오지 않아 외로운 침대 위에서 쌔액쌔액 거리면서 담배 조금만 피울걸... 후회하게 될 거다 " 




 ...써 놓고 보니, 역시 난 결코 착한 사람은 아니다.


 하지만 그것보다 날 더욱 스트레스받게 하는 것은 내가 악인이라는 것을 뻔뻔하게 무시할 만큼 철저하게 나쁜 놈 또한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런 고약한 저주를 퍼붓고는 이내 '와... 그런 인생은 좀 슬프다..' 하며 딱한 마음이 밀려온다.  

 어쩐지 아저씨의 구부정한 등이 누군가에게는 자상한 사람이겠지 싶기도 하면서.

 그러면 곧 '아저씨 건강하게 사세요.. 저주는 취소!' 라며 혼자 북 치고 장구치고 난리를 치는 것이다.

 이런 꼴이 스스로 습게 보일  있지 그래도 꼰대로 사는 것보단 훨씬 덜 비참하다고 생각한다.

  



 나는 차라리 피해자로 살기로 했다.



 

 날을 잔뜩 세우고 너도 똑같이 당해 보라며 진상 피우는 것은 이십 대 초중반의 잔재로 남겨두려 한다. 어쩐지 아프고 나서는 소금에 절인 배추처럼 좀 더 유연해진 것 같기도 하고.

 좀 더 유들유들한 어른이 되어야지 싶다.



'네 의지의 격률이 언제나 동시에 보편적 입법의 원리가 될 수 있도록 행위하라'라며 멋지게 말할 수 있는 지성인은 힘들겠지만, 궁시렁궁시렁 치이며 아도 말랑말랑한 생각       어른이 되는 것.


 그런 피해자로 산다면 적어도 나 자신에게는 떳떳할 수 있을 것 같다(호구가 될 생각은 없지만)






 단단한 꼰대의 틀 속에서 갇혀 사는 것이 훨씬 편하기는 하겠지만, 어차피 수월한 은 이번 생에 글러먹은 것 같으니 목표를 위해 약간은 더 노력해볼 생각이다.

   인생, 나중에 돌이켰을 때 괜찮은 인간이라도 되어 있지 않으면 정말 억울할 것  .


 물론 대단히 험난하고 귀찮을 것이다. 솔직히 자신도 없지만...


 그래도 역시, 뭐 바짝 말라 딱딱하게 굳어버린  아기 머리처럼 말랑말랑한 게 좋으니까.

 

 그것이 과일이든 생각이든. 

 어른이 되어가는 것 또한 마찬가지로.









 써 두었던 글을 이제야 정리해 올립니다.

 요즘은 독자느님들의 댓글을 알약처럼 복용하고 있습니다. 'Mega Ultra Gold'와는 다르게 말랑하고 달달하네요. 기운만 받고 답장을 빠르게 못 드려서 죄송한 마음입니다.

 몸을 수습하고, 주기적으로 나타난 개인적인 문제놈들을 처치하고 난 뒤, 고양이 착지하듯 조용히 답장올리겠습니다. 역시 답장은 은밀한 게 매력 있다고 생각하니까요.

 항상 읽어주셔서 정말 정말 정말 정말 감사합니다. 빠르게 수습하고 조만간 뵙겠습니다!




Ps. 아! 맞다! 가실 때 이거 하나 챙겨가세요..     (♡)



I'm going to church my problems(문제들을 처치하고 오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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