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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탱글통글 Oct 13. 2016

소소한 일기(병원편)


1. 진료를 받으러 혈액내과로 갈 때마다 건너는 횡단보도처럼, 인생도 흰색과 검은색의 경계가 명확했으면 좋겠다.

 그럼 좀 우스꽝스러워도, 지나가는 어른들이 한심한 눈으로 끌끌거리며 바라보더라도, 폴짝폴짝 흰 페인트만 밟고 갈 텐데.

 그리고 그 꼴이 스스로 우스워서 나는 아마 깔깔거리며 웃겠지.(2011. 11. 17)







2. 고대 근동 지역에서 계약을 맺을 때는, 짐승을 반으로 가른 후 종주권 계약을 맺은 종과 주가 쪼갠 짐승 사이를 지나갔었다고 한다. 이 의식은 둘 중 하나라도 계약을 어길 시에는 이 짐승과 같이 되리라는 뜻.

 참으로 호쾌하다.

 문명의 발전이랍시고 종이에 글자를 끼적거리며 서명을 하는 것보다 훨씬 믿음이 간달까. 사기범들의 수가 큰 폭으로 줄어들 것이다. 도축의 사회적 비용 절감은 보너스.

 물론 싱어나 레건 같은 동물 옹호론자의 반대가 심하다면 강간범의 물리적 거세로 유연하게 대체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일 테고. 뭐 의미야 대충 비슷하게 통하기는 하니까.

 병원에서 보는 유아 강간범 뉴스는 날 너무 힘들게 한다. (2012. 01. 20)





3. 재난이나 죽음 같은 큰 사건이 생기면 눈물짓는 것이 당연하지만, 아무런 사건 없이 반복되는 매일에도 슬퍼하는 존재 또한 인간이다.

 마치 오늘의 내가 그렇듯.(2012. 03. 21)





4. 나는 그녀가 건네준 달달한 위로의 말을 사탕처럼 입 안에 굴리다가 잠들 것이다. 나중에 충치로 고생할 수도 있음을 알고 있지만 어쩐지 전혀 상관이 없다. 나도 언젠가는 그녀 같이 아름다운 말로 사람을 위로해줄 수 있을까?(2012. 03. 27)





5. 몇 년만에 처음으로 피를 뽑는 것을 눈으로 지켜봤다. 수술은 척척 받으면서 주사로 피 뽑는 것은 항상 고개를 돌리고 있는 아이러니한 나로부터의 탈출.

 그 한걸음은 비록 지구에 있어서는 하찮은 사건 일지는 몰라도 나의 역사 속에서는 위대한 첫걸음이었다. 뿌듯해.(2012. 05. 10)




6. "넌 참 괜찮은 사람이지만..." 따위의 말보다는 차라리 "야이 나쁜 개자식아.. "라는 이별의 말이 더 속 시원할지도 모른다.

 '괜찮은데 도대체 왜 헤어진 거지?'라는 기분 나쁜 찝찝함이 2년이 지난 지금도 문득 떠오르는 걸 보면 말이다.


물론.. "괜찮은 사람이지만..."이라는 말 뒤에는 '개자식이야' 가 묵음 처리된 것일 수도 있지만.(2012. 05. 21)





7. 암환자가 대화를 하는 데에는 제약이 붙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병원 밖 복도에서 몰래 담배를 피우고 있는 구면인 인턴에게 "담배 피우면 암 걸려요..."라고 말했는데 동공이 흔들리면서 대단히 불길해했다. 나는 그저 "초콜릿 먹으면 살쪄요"라는 느낌으로 말했을 뿐인데.(2012. 06. 04)





8. 어릴 때부터 유독 사람이 죽으면 나비가 되어 날아간다는 말을 좋아했다. 유유자적 둥실둥실 떠다니는 모습이 부럽달까.

 그래서 만약 환생할 수 있다면 하늘하늘 떠다니는 나비가 되었으면 했다.


 그 정도로 나비를 좋아하지만 실제로는 멀리서 보는 것만으로 만족한다.  더듬이며 톡 터질 것 같은 겹겹의 몸통 하며... 으...

사실 가까이서 보면 나비만큼 징글징글한 것도 없으니까.


아..! 그러고 보니 마치 내 인생과 닮았다. 하루하루가 징글징글한데 또 막상 돌아보면 그럭저럭 아련한 것이.


 나는 어쩌면 이미 동경하던 나비로 살고 있는 걸 지도 모른다.(2012. 06. 18)





9. 초음파 검사를 받는 중, 불편한 부분은 없냐고 물어보는 간호사님께 "저.. 뱃속의 아기는 건강한가요?"라고 물었지만 웃어주지 않았다. 병원 생활 중 베스트 5 안에 드는 상처로 남을 것 같아.(2012. 07. 17)





10. 친구들이 오랜만에 병문안을 왔다. 몇 주 동안 갇혀 지내다가 오랜만에 본 외부인이 절세미녀나 전설 속의 유니콘이 아니라, 더러운 수컷들의 얼굴이라는 사실이 약간 짜증이 난다. 뭔가 지켜오던 소중한 무언가를 한순간에 똥물 밭에 굴린 느낌이랄까. 하지만 그쪽들도 오랜만에 본 친구의 얼굴이 삐쩍 꼴은 대머리라고 생각하니까 미안해졌다. 그래 미안합니다!서로  피차일반 구먼요!(2012. 08. 01)








 몸이 좋지 않아서 글을 쓰는 게 더니다. 혹여나 심심하실까봐 병원에서 쓰던 일기 몇 개를 옮겨왔습니다. 대부분 비공개로 쓰던 것들이라 평생 공개할 일이 없을 줄 알았는데 인생은 알 수가 없네요.

 뭐 물론 그렇기 때문에 두근거리기는 하지만서도..ㅎ 몸이 좋아지면 다시 돌아오겠습니다. 항상 읽어주시는거 자체만으로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일교차가 크네요. 여러분도 몸조심하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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