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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탱글통글 Oct 07. 2016

부지런히 살 마음이 딱히 안 드는데요?


 스무 살에 한 달 동안 호주로 배낭여행을 간 적이 있다. 내 글을 읽어오던 사람이라면 대충 짐작은 했겠지만 역시나 자아를 찾는다거나 상처받은 마음의 힐링 같은 그럴싸한 명분보다는 그저 '대학생이라면 배낭여행 한 번쯤은 다들 가보던데?'라는 시시한 이유였다.

 딱히 송파구에도 없는 자아나 힐링이 나 몰래 비행기를 타고 저 멀리 호주에 갔으리라 기대하는 낭만적인 사람도 아니.


 여행에는 각각의 스타일이 있는데, 유적지나 박물관을 돌아다니는 학구파 혹은 맛집이나 핫플레이스를 방문하는 부류도 있다. 아니면 역시 호주 특유의 드넓은 사막이나 맑은 바다를 떠올리며 레저 스포츠를 기대하는 여행객도 많을 것이다.


 나 같은 경우는 대략 10년 정도 거주한 현지인처럼 여행하는 스타일이다. 사실 이걸 여행이라 부를 수 있는 자격이나 되는지 모르겠지만.

 두근두근 설렘은 고이 접어둔 채 한껏 무표정한 얼굴로 쪼리를 질질 끌고 다니면서 마치 유목민처럼 주변의 가게나 건물을 설렁설렁 돌아다니며 풍경을 구경다가 마음에 드는 곳이 생기면 질릴 때까지 머무르곤 했다.



안녕하세오? 저 또 와써오.




 여행 절반 무렵 완벽하게 마음에 든 장소를 찾고서는 나머지 기간을 지내기로 마음 먹었다. 도보로 10분 정도 거리에 오페라 하우스가 보이는 공원을 갈 수 있는 곳이었다.


 하루 종일 오페라 하우스 근처를 어슬렁 거리면서, 단골이 되버린 미트볼 스파게티가 맛있는 수제 햄버거집에서 밥을 먹고 벤치에서 책을 읽거나 길거리 공연을 구경하며 지냈다.


 나름대로 대단히 만족스러웠던 여행이었는데 귀국하고서 오페라 하우스 천장이 클로즈업으로 찍힌 사진 6장 만을(심지어 지금은 다 사라진) 보여드렸을 때 부모님의 일그러진 표정을 보고서 보통 이런 식으로는 여행하지 않는다는 걸 알았다.


 그 후로 사람들과 같이 여행을 갈 때면 대부분 상대방의 스타일에 맞춰주기는 하지만, 어쩌다 혼자 여행이라도 하게 되면 여전히 스무 살 때의 방식으로 어슬렁거리고 만다.

 이건 의욕이나 기대가 없다기보다는 천성이 게으르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게으른 사람이다.



 '에헷.. 요런 게으름 꾸러기 같으니' 같은 가벼운 느낌이 아니라, '어휴.. 너 그러다가 돼지 된다'라는 탄식에 가까운 수준이다.



아니 그게 무슨 소리요.? 내가 돼지라니..?



 고등학교 졸업 책자에 '26살에 200억을 탈세해서 두바이로 가 치킨을 튀기겠다.'라고 쓸 정도였다.


 물론 그 후 많은 철학자들의 질타와 치킨을 튀기는 것의 어려움 그리고 한국을 그런 식으로 떠나기에는 이미 복잡하게 얽매여버린 돈보다 훨씬 소중한 것들 때문에 야망은 깔끔하게 포기해야 했지만.


 도덕적인 부분이나 디테일한 계획은 그렇다 치더라도 이 문장은 내가 얼마나 오래도록 게으른 삶을 동경해왔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 중 하나다.


 음식은 슬로우 푸드를 추구하라면서 인생은 빠르고 부지런하게 살아가라는 것은 어쩐지 열받는다.


'모두가 열심히 살아가니까 나 정도는 잉 살아가도 괜찮지 않을까?'라는 상상을 하기도 한다.


 소중한 것일수록 낭비가 즐겁다는 사실은 이미 많이 알려져 있다. 돈 낭비, 전기 낭비, 물 낭비 등은 양심의 소리를 무시한다면 꽤나 즐거운 일이다.

 

 그러니 단 한 번뿐인 귀한 인생을 잉여롭게 사는 것은 대단히 매력적인 일일 것이다.






 역시 부지런하고 바지런하며 빨리빨리 열심히 살아가는 것이 물론 나보다야 사회 공동체에 도움이 되기는 하겠지만, 뭐랄까.. 왜 그렇게 살아야 하는지 머리로는 알고 있어도 마음으로는 받아들일 수가 없달까.



 부지런히 살아가는 사람들을 찾아 살펴보기도 했지만 다들 그럴싸한 명분보단 대부분은 그저 돈 때문이었다.


 물론 돈이 필요하고 엄청 중요하다는 것 또한 알고 있어도 티브이, 잡지에서는 그렇게 많아 보이던 '와... 이 일이 너무 좋아서 행복해.. 이거라면 돈은 정말이지 상관없는걸?'이라며 직장을 다니는 사람은 적어도 내 주변에는 한 명도 없었다.

 모두가 그저 먹고살기 위해 다닐 뿐이다.


 그런데 아직 직장을 다닌 적은 없지만 주변 사람에게 들은 바를 종합해보면 그곳은 서로가 서로를 잡아먹는 자신만 정상인인 아수라판이다.

 개인여가 따위는 당연하게 포기해야 한다.

 덕분에 살아가는 의미도 모르겠고 이런 자신이 싫다는 사람도 수두룩했다.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그럴 바엔 나는 좀 가난하게 살 테니까 약간은 게을러도 행복하면 되잖아?' 라며 말처럼 쉽지 않은 다짐을 하게 된다.



아수라판이지만 정우성은 없다고 한다




 사실 대부분의 인간은 단지 살아있단 것만으로도 박수받을 존재이다.


 무균실에서 간수치가 몇 배나 올 가만히 누워만 있어도 죽을 것 같이 힘들 때, 살아 숨 쉬는 것만으로도 엄청나게 대단한 일이구나.. 하는 걸 알게 됐다.



 몸은 정자와 난자가 만난 그 순간부터 우리가 의식하지 않는 와중에도 살기 위해 끊임없이 분열하고 소멸하며 일하는 것이다.


 그래서 문득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암세포가 조금은 이해될 때도 있었다.

 조상 대대로 평생을 쉴 틈 없이 사용하고 버림 당하기를 반복하다 보면, 회사를 다니는 친구들에게 하루에도 몇 번씩은 듣곤 하는 "이렇게 일만 하다 버림 당하는 건 억울해" 같은 대사를 내뱉으며 죽기를 거부하고 암이 되는 세포는 충분히 있을 수 있다.

 더군다나 그들의 창조주 게으름을 동경하는 인간이라면  더더욱.


 드라마 대사처럼 암도 하나의 생명체니까 사랑해야 한다는 말에는 동의할 수 없지만 80살 즈음되면 이곳저곳 삐걱거리는 것 정도는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역시 늙어 죽는다는 건 대단한 일이다.. 부지런히 살지 못한다는 것만으로 비난받을 이유 따위는 전혀 없다.






 살아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감격할 만큼 게으른 인간이지만 그래도 양심은 있기 때문에 화려한 인생을 바라지는 않는다.


 나는 대체로 욕심이 없는 사람이다. 돈 욕심이나 출세나 명예에 대한 욕구도 그리 강하지 다. 어느 정도 스스로의 한계와 능력치를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인 것 같기도 하고.

 의욕이나 능력이 다고 하는 것이 정확할지도 모르겠지만.


 굳이 비교하자면 B급 로맨틱 코미디 주인공의 친한 친구 역할 정도의 인생이면 적당다.

 그럭저럭 대학을 졸업하고 가까스로 취직한 뒤, 웃는 게 매력적인 볼살 통통한 평범한 여자와 소소한 사랑에 빠 결혼, 아이는 둘 정도 낳고서 빠듯하게 살림을 꾸려 늙어가고, 일주일 정도 앓다가 죽는 누가 들어도 평범한 인생.(그 당시에는 이렇게 사는 것이 피똥 싸게 힘든 일이라는 걸 몰랐다)





 꿈꾸어 온 삶은 그저 평범한 인생이고 이 정도는 마음먹은 대로 움직여지리라는 환상 23살에 암이 재발함으로써 호쾌하게 어긋나 버렸다.


 방사선 치료 후 일 년 뒤 등록한 편입학원 첫날, 암 재발 판정을 통보받고 학원비를 전액 환불한 뒤 병원에 입원했다.

 희망차게 세우던 모든 계획들이 갑자기 중단됐그날 저녁에는 학원 책상보다 병원 침실에서 익숙한 편안함을 느끼는 내 몸이 정말 미웠다.


 슬퍼서 눈물이 나는 일은 거의 없지만, 부끄럽거나 억울할 때는 가끔 울기도 한다.


 그리고 당일 새벽에 지하철을 타고 학원을 가면서 느꼈설렘과 두근거림이 나는 상당히 부끄러웠나 보다. 


 아무도 모르게 병실 베개 밑에 '소소한 삶에는 미지근한 노력 정도' 면 될 거라는 나의 순수 혹은 무지를 묻으면서 어찌나 원통했는지.




그래서 사실은 알고 있다.



 인생이라는 다양한 변수 그리고 이런 몸으로 태어난 이상, 피해를 주지 않고 게으르게 살아가려면 아무리 일러도 환갑 즈음까지는 치열하게 노력해야 한다는 것을. 


 죽지 않으려면 죽을 만큼 노력해야 하는 세상이라고 하니까.


참나..



 그렇다고 '여러분 그러니까 우리 모두 죽을 만큼 힘 내보자고요!'라는 자기계발서 같은 멘트나 혹은 그럴싸한 해답으로 글을 마무리할 생각은 없다.


 난 여전히 게으르고, 쉬엄쉬엄 살아가는 게 좋은 데다, 어떻게 하면 조금이라도 쉽게 살아갈 수 있을지 치열하게 눈치 보며 찾아가는 중이니까.


 그저, 나를 포함한 이 글을 읽는 사람들이 약간은 아니 좀 많이 힘들기는 하겠지만 각자가 원하는 대로 살아갈 수 있기를 응원하며 글을 정리할 뿐이다. 

 그러다 혹시 기막힌 방법을 알게 된다면 나에게도 좀 공유해 주었으면 싶기도 하고.


 집 앞에 끝내주게 맛있는 라떼를 파는 집도 알고 있으니까(하트도 그려준다) 제발 연락해 주었으면 좋겠다.


아..쉬고 싶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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