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상 세계 내지는 메타 버스
콩깍지처럼 길쭉 통통하게 생긴 까만 부분을 가리키며 선생님께서는 누워 있는 나를 향해 발랄하게 입을 여신다.
“이 까만 부분이 아기집이에요.”
이번엔 그 안에 코딱지만큼 작은 하얀 점을 가리키시며,
“이건 아직 모양은 갖춰지지 않았지만 아기예요. 제가 심장소리도 들려 드릴게요.”
“콩콩. 콩콩. 콩콩...”
진짜? 어떻게? 내 배 안에 곱창도 아니고 똥도 아닌 정말로 '생명체'가 살아 움직이고 있다고? 뱃속에 뭐를(생명을) 품고 있다는 느낌이 요만큼도 없으니 저 상징적인 자궁 초음파 화면이 따로, 내 몸이 둥둥 따로 논다. 나는 오리지널 한국 태생이다. 이 땅을 한 번도 벗어나 본 적 없던 그 시절에는 지구본에 있다고 하는 미국이 정말로 실존하는 것인지, 파리에는 진정으로 에펠탑의 실체가 현실에 유지되고 있는지, 내 눈과 두 다리로 확인하기 전까지 나는 마음 깊은 곳까지 믿을 수는 없었다. 초음파 화면을 보는 게 딱 그 형국이다. 태평양 참치 못지않은 나의 보드란 뱃살 아래 정녕 생명이 자리 잡고 있다니. 선생님이 그렇다 하니 네 그렇군요, 있나 보군요, 하는 거지 어쩐지 저 화면은 내게 가상 세계나 다름없다. 주변에서 초음파 화면 제일 처음 볼 때 어땠냐고 물어보면 나는 실소하는 감정에 가깝다고 얘기한다. 나는 이 어색하고 낯선 이질감 탓에 선생님의 조곤조곤 말씀 옆에서 나도 모르게 "웃기다ㅋㅋ"라고 연신 종알댔다.
한편, 선생님의 비현실적인 판결을 듣고 있노라니 저 밑에서 자기 좀 봐달라며 조막만 한 감정이 손짓하는데… 넌 뭐니? 그리 폭발적이진 않은 걸로 봐선 잔잔한 기쁨 정도가 어울리겠다. 참 귀엽고 소소한 수준이다. 살면서 무언가를 성취했을 때의 기쁨에 비하면 백 분의 1도 안 되는 크기다. 이 기쁨이 소소해진 데는 이유가 있다. 쉴 틈 없이 불편한 메슥거림과 막연하게 번뜩이는 누군가에 대한 책임감 그리고 앞으로 겪게 될 삶의 변화 때문일 테다. 난 약간의 배신감이 들었는데 사람들은 입덧 얘기를 어찌 그리 우아하게 했던 걸까? 입덧이 이렇게나 기분 나쁜 느낌인 줄 알았다면 임신을 진지하게 고려했을 정도다. 가끔 심할 때는 임신이고 나발이고 반납하고 싶은 마음마저 든다.
그러나 난 마주할 대부분의 시간을 ‘해피하게’ 지낼 요량이다. 언제나 그래 왔었다. 어떤 일이든 막상 닥치면 그 나름에서 길을 만들고 헤쳐나가게 된다. 변화라는 것도 변화 자체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데 그것을 받아들이는 나의 두려움이 나를 주저하게 한다. 새로움에 적응할 때면 찾아오는 염려와 두려움이란 극히 자연스러운 감정인 것을 나는 감사히도 알고 있다. 그러나 온종일 이어지는 이 울렁거림과 속 쓰림은 머리털 나고 처음 겪는 감각이라 적응에 꽤나 시간이 들겠다. 이 역시도 현실적으로 어찌할 방도가 없으니 어쩌겠나, 잘 한번 감당해보기로 한다. 모니터를 바라보는 짧은 시간 동안 밀려드는 미묘한 감정들의 향연이 다채롭다. 그 와중에 작던 크던 기쁨이 느껴진다니 좋긴 한데 다만, 기쁨이 발생한 그 이유에 나는 약간 당황스러워지고야 만다.
가족.
남편, 양가 부모님, 내 동생 그리고 사랑하는 구순의 할아버지가 우리의 소식을 듣고 함박웃음 혹은 눈물로(?) 가득 찰 얼굴이 떠오르며 주머니에 행복 만땅 쿠폰 하나를 쟁인 기분이다. 이 쿠폰 탓에 은은하게 흥분이 맴돈다. 그리고 마음을 환하게 밝힌다. 여러모로 생명력은 대단하다는 것을 몸소 느끼는 시간.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메스꺼워 속은 너덜거리는데 누군가에게 선물할 것을 떠올리며 입꼬리가 씨익 올라가다니. 낯설고 낯설도다. 내가 언제부터 이렇게 이타적인 인간이었나?
[임신 4~5주 차]
초음파로 아기집과 난황을 확인할 수 있고 태아의 심장소리를 들을 수도 있다.
이 무렵부터 산모의 후각이 폭발적으로 예민해짐과 동시에 입덧이 시작되므로 남편들은 냉장고 문을 열 때나 음식물 쓰레기 처리에 각별한 눈치를 탑재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산모의 입덧 정도에 따라 별안간 쥐 잡듯 잡히는 봉변이 발생할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