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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자가 천국엘? 가치함수로 풀면..

생각에 관한 생각 찜쪄먹기

by 김톨



이제 우리의 문제는 명확해졌다. 대니얼 카너먼과 함께 하나씩 짚어가다 보니, 사람의 인생은 무조건 기쁨보다 슬픔이 큰 상황이 되어버렸다. 뇌의 구조 자체가 그렇단다. 그렇다면 우리는 잘못한 것 하나 없이 고통을 감내하면서 살아야 된다는 얘긴데.


나는 이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도대체 우리가 왜.. 하지만 어쩔 텐가. 방법이 있나? 나의 AI 페룬은 '기준점을 바꾸면 된다'는 모범답안을 제시했다. 저 높은 곳에 올라붙어 있는 비교의 기준점을 저 아래쪽 낮은 곳으로 옮기라는 얘기다. 낮은 곳으로 임하소서... 이런 말도 있다시피.


물론 이건 틀린 얘기가 아니다. 이게 만일 남의 일이었다면 나도 그렇게 영혼 없이 대답했을 것이다. 하지만 정작 그 고통이 바로 나 자신에게 벌어지고 있는 절절한 실제 상황이라면? 도대체 기준점을 어떻게 내 맘대로 올렸다 내렸다 한단 말인가. 애당초 기준점이 올라가 버린 것도 내 의지에 따라 진행된 일은 아니지 않나.


아닌데 아닌데.. 이런 고민이 계속 이어지던 순간, 문득 머릿속에 예수 그리스도가 남긴 유명한 성경 구절이 생각났다.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어렵다."
- 마태복음 19:24, 마가복음 10:25, 누가복음 18:25


나는 크리스천도 아닌데 갑자기 왜 이 문구가 떠올랐는지는 미스터리다. 하지만 생각해 보니 뭔가 연결고리가 있어 보이기도 한다. 난 파고들기 시작했다.


신학자들은 이 구절을 놓고 다양한 해석을 하는 것 같다. 여기에 '부자'라는 좀 민감한 단어가 적시되어 있다 보니, 결국 계급논란으로 이어져 해방신학과 민중신학의 토대가 되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는 이것을 도덕적인 교훈으로 해석했다. 사람이 재물에 욕심을 많이 내면 신실한 신앙생활을 영위하기 어렵다는 그런 얘기다.


과연 그럴까? 보통 사람도 아니고 무려 예수 그리스도다. 그런 그가.


자넨, 돈이 많으니까 안 되겠군. 저리 꺼지시고.. 오 여긴 가난하네. 그럼 이리 오시게.


이게 무슨 저소득층 정부지원금 판정기준인가. 그럴 리는 없다고 본다.


나는 이 구절이 그 정도로 단순한 메시지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성경도 그렇지만 다양한 고대의 텍스트들을 살필 때 가장 조심해야 되는 것이 바로 단어가 사용된 맥락이다. 같은 단어라도 고대와 현대라는 시간적 간극이 있다 보면 그 뉘앙스가 상당히 달라질 수 있다. 조심해야 된다. 또 이건 좀 다른 측면인데, 어떤 주장을 펼치는 명제를 살필 때 용어의 정의를 명확히 확인해야 된다. 이 두 가지가 쟁점이다.


'부자 rich man'는 오늘날 금융권에서 VIP로 대접하는 거액자산가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영문개역성경이 나오기 전의 고대 판본을 확인해 보면, 히브리어로는 ashir, 고대 그리스어로는 plousios로 표기되어 있다. 그리스도 당시는 로마제국의 공화정 시절이었고, 유대 땅은 총독이 다스리는 식민지였다. 10 단계 정도로 세분화된 신분제도가 있었으며, 사유재산도 인정되었지만 일정 신분 이상에서만 의미가 있었다. 그리고 재산이라고 하는 것은 대부분 돈이 아닌 땅이었다.


결론적으로 rich man은 당시의 최상위 신분인 로마 권력층, 헤롯 왕가를 비롯한 토착 지배세력, 종교엘리트, 율법계층, 중산 지주계층 정도까지로 볼 수 있다. 여기서 제외되는 사람이 '땅의 사람들'이라 불린 암 하아레츠(평민), 사회적 주변인과 소외계층(창녀, 병자, 장애인, 이방인) 그리고 노예들이다. 그리스도가 가장 일상적으로 잘 어울렸던 계층은 사회적 주변인들이었다고 한다. 당시 로마 지배계층의 입장에서는 그리스도를 계급 논란의 당사자로 충분히 지목할 만했다고 보인다. 하지만 그것은 고대 로마인 그들의 해석이고. 우리는 우리의 해석을 하면 된다.


그리고 '천국에 간다'는 것은 크리스천들의 표현으로는 '예수를 영접하는 것'이고, 이는 기독교 신앙의 최종 목적지가 된다. 따라서 '부자가 천국 가기 어렵다'라고 말한 것은, 단지 부자라는 이유 그것 하나 만으로 그들 신앙의 종착지에 도달할 수 없다고 단정 해 버린, 어마어마하게 중요한 메시지가 된다. 이 정도 멘트가 그냥 도덕적인 아포리즘에 불과할까. 과연 그럴까. 의심해 봐야 된다.


부자를 돈 많은 사람에 한정하든 범 지배계층으로 확대시키든 그들의 공통점을 우리가 지금까지 논의해 왔던 시각으로 한번 살펴보자. 지난 포스팅에서 살펴보았던 카너먼의 가치함수를 다시 소환한다.





기억나시는가? 바로 이거였다. 잠깐 복습하자면.. 우측 이득구간에서의 기울기보다 좌측 손실구간에서의 기울기가 더 가팔라서 사람들이 이득과 손실에 대해서 느끼는 기쁨과 슬픔의 크기가 달라진다고 했다. 또 한 가지 중요한 것은 이득과 손실을 판단하는 기준점이 위 표준함수에서는 0에 세팅되어 있다는 점이다. 가치중립이라는 뜻이다.


이에 비해 부자들의 가치함수는 아래와 같이 우측으로 상당히 이동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원래의 표준함수에서는 기준점이 XY 축이 교차하는 0 지점에 세팅되어 있었다. 이에 비해 위 부자들의 가치함수는 기준점이 0을 훨씬 상회하는 높은 곳에 도달해 있다.


많은 자산, 우월한 사회적 지위, 뭇사람들의 공경과 선망, 상당한 수준의 권력. 이런 것들이 잘 구비된 사람일수록 상류층 또는 지배계층에 가깝다. 그리스도가 얘기한 부자다. 이런 사람들은 자신이 부자가 되는 과정에서 부지불식간에 조금씩 조금씩 잣대가 올라가게 되는 것 같다. 내가 보기엔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니다. 처음엔 그렇지 않았는데 어느 순간 보면 모든 것을 판단하는 기준점이 쑤욱 올라가 있다. 집도 차도 배우자도 하다못해 가방도 그냥은 만족이 되지 않는다. 금전적인 것만 그럴까? 아니다. 자녀도 좋은 학교 가야 되고 사위 며느리도 아무나 못 받는다. 올라간 기준점은 생활의 모든 면에 영향을 미친다.


아이러니컬하게도 기준점이 올라가면 갈수록, 자연스럽게 위의 그래프와 같이 기쁨의 영역보다 슬픔의 영역이 더 커진다(수학의 적분 개념). 이것이 바로 고통으로 가득 찬 인생이다. 천국의 반대쪽이다.


상당히 추상적인 논의가 계속되고 있다. 잠시 쿨 타임이 필요할 것 같다.


엄청난 사회적 지위에 올라서고도 이렇듯 천국의 반대쪽으로 직행해 버린 생생한 캐릭터들이 있다. 이들을 한번 살펴보면서 현실감각을 끌어올려 보자.


오늘 주제에 딱 어울리는 TV 미니시리즈가 있었다. 필자의 연재 '노바 오딧세아' 첫 번째 에피소드인 철학교수 편에서 잠깐 언급했었던 '재벌집 막내아들'이다. 국내 최고의 재벌가 집안 내부에서 벌어지는 권력투쟁을 실감 나게 그린 퀄리티 있는 웹소설이다. 반응이 좋아 결국 TV 시리즈로도 제작되어 많은 시청자들에게 사랑을 받았다. 작중에서 주요 캐릭터들은 그룹 오너로 나오는 진양철 회장의 눈에 들어서 최대한 자신의 지분을 늘리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한다. 환생한 주인공 진도준이 복수심에 불타서 이들을 처절하게 응징하는 이야기인데. 주연들도 훌륭했고. 조연으로 나오는 캐릭터들의 연기력도 정말 압권이었다.


무기력한 장남 진영기(장현성 분), 냉소의 캐릭터 진화영(김신록 분) 이 두 명이 오늘 포스팅의 초대손님이다. 둘 다 예수 그리스도가 말하는 부자에 맞아떨어진다. 아버지가 아직 살아계시니 그룹의 일인자가 아닐 뿐이지 대한민국 사회에서 가질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가졌다. 자 그들의 명대사 하나씩 살펴보자.


먼저 진영기부터. 독자 여러분들이 기억이 나시려나 모르겠다.


“왜 아무도 내 말에 힘을 안 실어주는 거지?”


... 정말 안습이다. 진영기는 그룹에서 가장 큰 계열사를 여러 개 갖고 있다. 중견기업 하나만 해도 어마어마한 건데. 무려 국내 굴지의 대기업이다. 차렷 자세로 서서 자신만 쳐다보는 임직원이 수 천명, 수 만 명이다. 더 이상 무슨 힘을 더 실어야 되나. 그런데도 불구하고 아버지의 주목을 끄는데 번번이 실패하니까 저런 얘기를 한다.


이번엔 진화영 차례.


"아버지 마음, 아무도 모르죠. 알았으면 지금 이러고들 있겠어요?"


진화영은 주력계열사는 아니지만 알짜회사를 가졌다. 원래 제일 좋은 건 사장이 아니고 부사장이라는 얘기가 있다. 권한은 있는데 책임은 없는 것이 부사장이고 이인자의 자리다. 1등 먹고 싶은 마음만 살짝 내려놓으면 이인자의 자리를 차지할 수 있다. 해 보면 이렇게 좋은 게 없다. 진화영은 그걸 먹었다. 그런데 아버지 마음이 왜 또 궁금한가. 1등 하고 싶은 마음을 완전히 내려놓지 못했기 때문이다.


자 이 정도면 쿨 타임은 지나간 것 같다. 다시 힘을 내서 책을 펼쳐보자. 이 정도로 끝내면 안 된다. 우리는 항상 그래서 뭐? 그래서 어쩔 건데를 생각해야 한다.


고교시절 수학을 배울 때, 명제라는 파트가 있었다. 어떤 조건 명제 A 가 참이라면, A의 대우명제도 참이다. 이런 내용이 있다. 이것도 오늘의 생각을 정리하는데 도움이 된다.


조건명제 A : 부자가 천국 가는 것은 어렵다
A의 대우명제 : 천국 쉽게 간 사람은 부자가 아닐 것이다


말장난이 아님을 다시 한번 말씀드린다. 수학과 논리학이라는 처절하도록 이성적인 학문에서 이미 증명이 완료된 것을 '자명하다'라고 표현한다. 조건명제가 참일 때 대우명제도 참이라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따라서 성경말씀이 참이라면 위의 대우명제도 참이 된다.


그렇다면 누가 천국을 쉽게 간다는 얘긴가? 그것은 부자가 아닌 사람이라는 것이 자명하다. 위에서 부자의 가치함수를 살펴보았다. 그렇다면 가난한 자들의 가치함수는 어떻게 그려질까? 쉽다. 기준점을 왼쪽으로 더 낮추면 된다. 그러면 그래프가 위와 반대쪽인 손실방향으로 이동한다. 곰곰 생각해 보면 그 방향이 천국으로 가는 방향이다.




기쁨의 영역이 훨씬 넓어졌다. 수학에 극한이란 것이 있었던 것 기억하시나? 저 그래프를 왼쪽 끝으로 끝으로 극한까지 밀어붙이면 세상 모든 것이 기쁨이다. 슬픔이 없는 그곳. 그곳이 천국 아닌가. 돈 없어도 명예도 지위도 아무것도 없어도, 오늘 아침 햇볕이 싱그러우면 그것만으로도 너무나 행복한 경지. 라면 한 그릇일지라도 함께 나눠 먹을 가족이 있다면 그것도 감사할 일이고. 잘난 것 하나 없는 친구인데 나를 사랑해 주는 재주가 있다면 그놈이 최고다. 뭐 그런 얘기다.


이런 영역에 머무를 줄 알았던 사람들은 어떤 캐릭터들일까?


영화 기생충의 주인공 기택(송강호 분) 기억나실 테다. 기택은 비루한 삶을 살지만, 가족을 지키려는 헌신과 인간적 온기가 돋보였다. 가장 밑바닥에 있으면서도 잔잔한 유머와 삶에 대한 끈질긴 애착을 보여준 인물이었다. 기택이 천국에 가까운가 진영기가 가까운가? 그걸 알면서도 왜 우리는...


미나리 영화에 나온 순자 할머니(윤여정 분)는 또 어떤가. 그는 가난한 이민자 가정 안에서 언제나 뒷자리에 있었고 늘 조용하지만 따뜻한 존재였다. 손자에게 사랑을 전해주며 고통 속에서도 무너지지 않는 온유함을 지녔다. 세속적으로는 가장 낮았지만, 인간적으로는 가장 높은 자리에 있었던 존재. 과연 진화영이 천국에 가까운가 순자 할머니가 가까운가? 왜 우리는...


이 정도면 되었다. 하지만 아직 남은 것이 있다. 바로 위에 적은 '왜 우리는..'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나는 카너먼의 가치함수를 확 꺾어서 비틀어 버리려고 한다. 그렇게 해 놓고 보면 놀랍게도 그 모양이 우리나라 태극기 제일 중간에 있는 태극 모양이 된다. 태극은 동양철학의 정수가 담긴 다이어그램이다.


다음 주에는 대니얼 카너먼과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동양의 음양철학이 세계 최초로 한자리에 모이게 된다. 관심있는 독자분들은 기대하셔도 좋다.



(다음 편에서 계속 / 매주 토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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