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에 관한 생각 비틀기
지난 연재에서 필자는 카너먼의 가치함수를 비틀어버릴거라 예고했다. 이유는 단 하나. '왜 우리는...' 이라는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였다.
현명하지 못한 이들은, 자기 딴에는 진심 어린 조언을 한답시고, 힘겨워하는 이들에게 대책 없는 충고를 쏟아내곤 한다.
다 내려놓아야 돼..
이런 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물론 맞는 말이긴 하다. 하지만 그걸 누가 모르나. 내려놓아야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실천하지 못하는.. 그게 문제 아닌가. 지난 연재 말미에 '왜 우리는...' 이라고 굳이 필자가 적어 둔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지금 이 정도로는 안 된다. 좀 더 파고들어야 된다. 어릴 때 수학문제 풀던 기억을 되살려 보자. 공식만 외우면 그 문제는 풀 수 있지만 응용이 안 된다. 응용을 하려면 개념을 확실히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지 않았던가. 지금도 마찬가지다.
가치함수는 사전적인 평가일 뿐
사실 카너먼의 가치함수는 한 가지 큰 전제가 있다. 가치함수를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사람들의 사전적 평가이다. 즉 저런 모습의 그래프가 그려지는 것은 이미 어떤 일이 벌어진 뒤에 내가 평가한 가치가 아니라 그 일이 벌어지기 전에 먼저 한번 생각해 본 가치라는 점이다.
로또를 생각하면 쉽다. 좋은 꿈을 꿨다고 로또를 사서 추첨을 하는 토요일 저녁까지 기다릴 때. 내가 사전적으로 생각하는 그 로또의 가치는 아주 높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1등은 물론이고 심지어 5등도 당첨되지 않았다면 그 로또의 가치는 어떻게 될 것인가. 고민할 것도 없다. 그건 그냥 휴지조각에 불과하다.
사전적으로 기대한 가치와 사후적으로 실현된 가치 사이에는 큰 간극이 있다. 그 간극은 '발생확률'에 좌우된다.
무슨 말인지 차근차근 풀어보자. 가치함수의 가로축은 이득과 손실이다. 이득을 추구하는 방향은 그래프에서 x축의 오른쪽 방향이다. 그 방향으로 죽죽 가면 이득이다. 사람들이 이해하기 쉽게 투자라는 것을 가지고 한번 짚어보자. 어딘가에 투자를 한다면 어떤 순서로 이득이 클까? 재테크 좀 한다는 친구들에게 물어보면 이런 식의 답을 내놓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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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여기에 함정이 있다. 맨 오른쪽 로또! 가치함수를 그대로 따른 다면 로또에 가장 큰 가치가 부여된다. 오른쪽으로 갈수록 그래프가 우상향 하니까 가치에 해당하는 y값이 자꾸자꾸 커진다. 하지만 이건 좀 아니지 않나? 확률이란 게 있는데.
우리의 커너먼도 바보가 아닌 이상 당연히 이 문제를 짚었다. 사실 커너먼의 논문 후반부는 이 문제로 가득 차 있다. 그는 사람들이 낮은 확률은 생각보다 과대평가하고 높은 확률은 과소평가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즉 로또 1등 당첨확률이 8백만 분의 1인가 그 정도 확률인데. 사람들은 이것을 실제보다 더 높게 느낀다는 얘기다.
이 과정에서 대표적으로 동원되는 논리가 있다. 이번엔 다를 거야. 어젯밤 꿈이 괜찮았어. 등등 이런 식으로 자기 합리화를 시도한다. 이런 것은 심리적 방어기제도 아니다 그냥 망상일 뿐이다. 투자 말고 더 자극적인 예를 들어보자. 쾌락은 어떤가? 정상적인 사람들은 보통의 즐길거리, 레포츠나 취미활동을 통해 쾌락을 얻는다. 만약 이런 걸로 만족이 안 된다면? 더 과하면 어떻게 되나. 마약이다. 진짜 마약에다가 높은 가치를 부여할 텐가.
반대 방향도 살펴보자. 과도한 손실 쪽이다. 예컨대 경제적인 문제로 빚을 갚지 못해 곤경에 처한 사람들은 드물지 않다. 이거 해결 못하면 자살 밖에는 답이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안타깝게도 극소수의 사람들은 실행에 옮기기도 한다. 비극이다. 하지만 빚이 많다고 해서 반드시 인생이 끝나는 것은 아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개인회생제도를 이용해서 채무탕감을 받은 다음 재기를 시도한다. 물론 실제 상황이라면 이건 아주 어렵고 힘든 문제다. 제삼자가 별 일 아닌 것처럼 가볍게 언급할 일은 아니다. 이 정도만 하자.
발생확률을 고려하면 그래프 모양이 바뀐다
중간 결론을 내려보자면 우리가 사전적으로 아주 큰 가치를 부여했던 것들일수록 실현확률이 낮다. 반대방향도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카너먼의 가치함수를 발생확률을 고려해서 다시 그려보자. 어떻게 될까? 이 대목에서 커너먼은 직관적으로 이해하기에는 너무 어려운 수학적 기법을 사용했다. 수학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 카너먼의 그래프가 어렵다. 그걸 3차원으로 그려놨다. 못 쓴다 그것은. 그래서 필자는 커너먼의 취지는 살리되 보기에는 훨씬 쉬운 그래프를 그려보았다.
카너먼이 보면 논리적 비약이라고 할 수는 있겠다. 하지만 직관적으로 보기에는 이게 훨씬 편하다. 이 그래프는 저 위에 있는 원래 카너먼의 가치함수가 임계치 부근에서 더 이상 위아래로 뻗어나가지 못하고 다시 주저앉는 모양을 보여준다.
말로 해석하자면, 임계치를 넘어서는 구간부터는 발생확률이 점진적으로 떨어지기 때문에 그것을 고려한 기대값(기대가치)를 표현한 그래프라고 할 수 있다. 나는 앞으로 이것을 '마음함수'라 부를 것이다. 로또가 사전적 가치는 높지만 꽝이 되었을 때의 가치는 0에 수렴한다는 것을 반영했다고 보면 된다.
커너먼의 가치 X 실현확률 = 기대가치 --> 마음함수
이것을 다시 원래의 가치함수와 비교해 보자. 아래 그래프에서 원래 커너먼의 가치함수는 점선 부분이다. 이에 비해 실현확률을 고려하여 기대가치로 조정된 마음함수는 실선 부분이다. 이 두 영역의 차이 공간이 바로 집착과 염려를 표상하는 곳이다. 한마디로 제거대상이다. 점선에서 화살표 방향으로 내리는(올리는) 행동, 바로 그것이 '내려놓기' 아닐까.
당첨확률도 없는 로또 같은 것에 어마어마하게 높은 가치를 매기고 있다면 그런 것은 비합리적인 생각이라는 점을 알아차리고 이제 그만 내려놓으라.. 그런 얘기다. 로또가 쉬우니까 예를 들었는데, 우리가 살면서 과하게 욕심내는 여러 가지 것들을 로또 대신 대입해 보면 또 다른 해석이 가능할 것이다.
내려놓기와 관련하여 성경과 불경 모두에서 비슷한 언급을 찾아볼 수 있다.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 (베드로전서 5:7)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마태복음 5:3 산상수훈)
지난 연재에서 부자와 관련하여 충분한 논의를 했다. 성경은 가난한 자에 대해서도 언급한다. 염려를 다 맡기라... 내려놓으라는 얘기다. 다만 기독교에서는 그 염려를 주께 내려놓으라고 한다. 심령이 가난한 자가 염려를 내려놓을 줄 안다면.. 복이 있을지니 천국이 그들의 것이다.
집착을 잘라내고 욕망을 버려라. 갈애의 뿌리를 뽑은 자는 이 세상에서 해탈하리라. (법구경 애욕품 제348게)
불교도가 아니더라도 법정스님의 '법구경'을 아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법구경은 수행자가 지켜야 될 덕목을 제시한 경전이다. 출가 수행자이든 재가 수행자이든 상관없다. 마음챙김을 하기 위해서는 내려놓기가 필요하고 위 경문은 그것을 직설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오늘 필자의 포스팅은 이러한 '내려놓기'라는 것이 어떤 메커니즘으로 실행되는 것인지 그리고 그 효과는 어떤 형태로 나타나는지를 행동경제학의 대가 대니얼 커너먼의 아이디어를 토대로 재구성한 것이다. 마음챙김과 내려놓기에 대해서는 안 그래도 아주 많은 텍스트들이 있지만, 어떤 사상이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면 이리 돌려도 보고 저리 돌려도 보고 뭔 짓이라도 다 해 봐야 된다.
그런 과정을 거쳐야 '알아차림'이란 것을 얻을 수 있다고 본다. 오늘 이런 방식의 해석도 새로운 접근이란 면에서는 나름의 의미가 있다. 새로운 접근은 지금까지 사용하지 않던 뇌의 다른 시냅스에 불을 켜 준다. 중요하다.
커너먼과는 이쯤에서 헤어지자. '휴리스틱'이라는 중요한 아젠다가 하나 남았는데, 이건 나중에 한번 다시 살펴볼 기회가 있을 것이다.
마음함수를 파동으로 볼 수 있는가?
자, 이제 오늘의 두 번째 주제로 넘어간다. 마음함수를 저렇게 그려놓고 보니. 모양이 어째 좀 뭔가를 닮은 것 같다. 저 위에 그려진 마음함수의 가장 오른쪽과 가장 왼쪽 부분은 어차피 0에 수렴하는 부분이다. 잘라내 버려도 그만이다. 그렇게 해서 그래프를 좀 다듬어 보자.
이 그래프는 무엇인가? 바로 주기가 2파이인 사인함수의 모양이다. 마음함수를 보다 근사하게 표준화시켰다고 보면 되겠다. 생뚱맞게 이건 왜 가져왔냐고?
여태까지 사람의 마음과 심리는 자연과학의 영역이 아니었다. 사람의 마음은 인간의 언어로는 표현할 수 있었지만 수학으로 기술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만일 수학으로 기술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낸다면 그 파급효과는 어마어마하다. 인문학의 수학화!
커너먼이 해 낸 놀라운 작업이 바로 이것이다. 커너먼은 사고실험을 통해 그간 손에 잡힐 듯 말 듯했던 사람의 심리를 수식과 그래프로 표현해 냈다. 즉 인간의 마음에 수학이라는 옷을 입혀버린 것이다. 필자가 알기로 지금까지 이런 시도는 없었다.
이와 별개로 그동안 인류는 어마어마하게 많은 수학적 도구들을 만들어냈다. 사칙연산과 같은 간단한 것부터 미적분에 이르기까지 많은 도구들이 존재한다. 따라서 어떤 현상이 수학의 옷을 입는 순간 보다 새로운 접근, 창의적인 연결, 전혀 다른 해석 같은 것들이 가능해질 수 있다.
앞서도 얘기했듯이 인간의 뇌가 새로움을 접하는 순간 그동안 쓰지 않던 시냅스에 전기적 자극이 통하게 되고, 여차하면 새로운 깨달음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있다. 그래서 수학적으로 한번 살펴보려고 하는 것이다. 혹시나 있을지 모를 우리의 새로운 통찰을 위해서 말이다.
마음함수가 사인곡선의 모습이란 것은 어떤 새로운 통찰을 주는가? 이 주제는 어차피 오늘 다 끝낼 수 있는 분량이 아니다. 오늘은 일단 중간결론만 내려보자. 자세한 건 다음 주에 또 보면 될 터이다.
사인함수는 삼각함수이다. 삼각함수는 사실 이름과 달리 원을 정의하는 오일러의 공식과 관련된다. 잘 살펴보면 사인곡선은 반원 두 개를 따로 떼어내 붙여놓은 것에 불과하다. 즉 삼각함수는 원에서 출발했고 원은 그 자체로 완전한 도형이다. 삼각함수는 원래 제자리에서 순환하고 있던 원을 찢어내서 주기적인 파동으로 다시 표현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일반적인 생각으로는 사람 마음이라는 심리적 현상이 '원'을 닮았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어렵다기보다는 황당하다. 갑자기 웬 원? 또 그게 사람의 마음과 무슨 상관?
파동을 거론한다면 여기 태극도 있다
하지만 사람의 마음이 삼각함수로 표현될 수 있다고 전제한다면, 수학만 놓고 보면 삼각함수는 원과 너무나도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다. 또한 삼각함수는 파동을 기술하고 있기에 양자역학에서 입자냐 파동이냐 하는 논란으로도 확대된다. 점점 배가 산으로 가는 것 같은가? 이 타이밍에서 사진을 하나 꺼내보자.
이것은 양자역학의 선구자이자 1922년 노벨 물리학상에 빛나는 닐스 보어 Niels Bohr 가 개인적으로 사용했던 문장이다. 한가운데 태극문양이 그려져 있고 상단에 있는 문구는 'contraria sunt complementa'이며 라틴어로 기재되어 있다. 상반되는 것들은 서로를 보완하는 관계라는 뜻이다.
이것은 양자역학에서 입자와 파동이 서로 대립하지만 함께 있어야 전체적인 물리현상을 설명할 수 있다는 상보성 원리를 표현함과 동시에, 동양철학에서 얘기하는 음양의 대립과 조화를 같이 나타내고 있는 말이다.
보어의 문장에서 태극이 발견되었다. 우리나라 태극기의 한가운데 그려져 있는 그 태극과 동일하다. 그 모습 또한 사인곡선과 동일하다. 이것은 우연인가? 논리적 비약인가? 신비주의인가? 아니면 대통합의 단초인가.
오늘 원래는 두 번째 주제까지 포스팅을 완료할 생각이었으나 분량 관계상 다음 주로 미룰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다음 주에는 수학사에 영원히 빛날 불세출의 천재 레온하르트 오일러 Leonhard Euler 를 초대할 것이다. 모든 수학자들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수식이라고 인정하는 오일러의 공식(단위 원을 기술하는 함수)과 태극의 개념에 비추어 인간의 마음이란 것을 새로운 각도에서 한번 짚어보려 한다.
(다음 편에서 계속 / 매주 토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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