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앙마이 님만해민
실감나지않는 하루하루를 거쳐서 결국에는 이렇게 치앙마이. 서울에서 그동안 집을 정리하고 반려묘를 맡아줄 사람을 구하고, 앞으로 뭐 먹고 살지에 대해 고민하던 나날들이었다. 떠나기 전날, 밤새 짐을 싸다가 문득 내가 이렇게 사랑하는 것들을 두고가야만 하는가에 대한 생각이 들었다. 매일 붙어다니는 친구는 만날 때마다 아쉬워 훌쩍댔고, 남의 손에 맡겨진 반려묘는 이동으로 인해 꽤나 스트레스를 받았다. 그동안 10년치 짐을 짊어지고 다녔던 결과, 버려야 할 쓰레기와 본가에 맡겨둔 이삿짐이 산을 이뤘다.
서울에서의 삶을 정리하는건 그 무게만큼 힘들기도 했지만, 묵었던 체증이 내려가는 것 같이 시원하기도 했다. 갖고있는줄도 몰랐던 엑스들의 사진과 편지를 버리고, 보풀이 일어난 온갖 옷을 버리고, 중학교 때부터 써왔던 오글거리는 일기장과 다이어리는 ‘창고행-절대 열지마세요’라는 문구와 함께 본가에 봉인되었다. 그것들을 하나하나 살펴보며 정리하는 과정에서 내 삶 또한 정리되는 기분이 들었는지도 모른다.
또냐, 미쳤구나, 그래 갈때가 됐지 라는 친구들의 진심어린ㅋㅋ 배웅을 받으며 출발길에 올랐다. 여행은 자주 갔지만, 해외에서 살아보는 것은 처음이라 앞으로 어떠한 하루하루가 펼쳐질지 기대와 두려움이 몰려왔다. 아… 상투적인 표현이라 싫지만, 따로 표현할 문장이 없다.
원래의 계획은 방콕 수완나폼에 밤에 도착한 후, 후안나퐁 기차역 근처 숙소로 이동해 1박을 하고 다음 날 저녁에 밤기차를 타고 치앙마이로 가는 것이었다. 방콕-치앙마이행 밤기차는 해볼만한 경험이라는 평가가 많았기에 이번 기회에 시도해보기로 마음 먹은 것이다. 그러나 6시간 반 동안 기내 안에 쪼그려진 채로 덩그라니 수완나폼 공항에 도착하니, 딱 모기향만큼 유지하고 있었던 야간기차에 대한 열정도 삽시간에 불이 꺼진 상태였다. 유심을 사고 환전을 하니 시간은 10시 반. 착한 여행자는 이제 잘 시간이다.
‘그냥 여기서 노숙하고, 다음날 비행기를 타고 치앙마이로 가면 어떨까?’하는 귀차니스트스러운 아이디어가 떠올랐고, 즉시 내일 오전에 출발하는 치앙마이행 비행기를 예매하기에 이른다. 배낭 여행의 성지인 방콕의 공항답게 노숙하는 이들도 많겠다, 지하 1층부터 4층까지 곳곳을 살피며 적당한 곳을 고르기 시작했다. 사실 함께하는 이들만 있다면 공항 노숙은 별로 겁낼 이유가 없다. 동행이 아니어도 된다. 공항 이곳저곳 가방을 껴안고 쭈그리고 잠들어있는 이들이 바로 우리들의 노숙 동무 아니겠는가. 적당히 어둡고 조용한 지하 1층에 버리려고 가져온 코트를 바닥에 깔고, 가방을 껴안고 잠이 들었다. 방콕 수완나폼 공항은 새벽 동안 출발하는 비행기가 있기에 식당, 카페, 커피숍 모두 24시간 운영중이라 위험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다음날 오전, 잠이 덜깬 몽롱한 정신으로 치앙마이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태국 국내편인데도, 온갖 국적이 다른 외국인이 타고있었다. 기내에 오르자마자 실신하듯 잠이 들어 착륙할 때 눈이 떠졌다. 딱 반년만이던가. 반년 전 치앙마이를 떠올리면 친근하고 유쾌한 사람들이 제일 먼저 떠오른다. 레스토랑에서 밥을 먹다가도, 재즈바에서 음악을 듣다가도, 길을 걷다가도 쉽사리 친구가 되어 어울릴 수 있는 곳이었다. 장기거주하는 외국인이 많고, 이들이나 태국 현지인들이나 워낙 오픈 마인드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리라.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사랑해마지않는 더 노스 게이트 재즈바에서 음악을 듣고 있었을 때였다. 옆자리에 중년 현지인 여자 두 분께서 앉아계셨는데, 가볍게 인사를 나누다가 문득, ‘더 좋은 곳에 곳에 가볼래?’ 하셨다. 나 또한 갱장히 한 오픈 마인드하는 사람이기에 오케이를 외치고, 이분들 차에 올라탔다. 이때가 밤 10시 경이었는데, 라이브바-사원-카바레스러운 라이브바-야시장-이분들 아파트-숙소 순의 말도 안되는 루트를 거쳐 새벽 4시에야 숙소에 기어들어가 잠들 수 있었다. 어찌나 유쾌하시고 밝으신지 아무도 춤추고 있지않는 라이브바에서 춤추자고 하셔서, 태국 전통 음악에 맞춰서 말도 안되는 춤을 춰댔던 기억이 난다. 그치만 모르는 사람 차에 타거나 집에 가는 거슨 상당히 위험하니 최대한 조심하자. 라고 뒤늦게 첨언을 더해본다.
치앙마이에는 크리스마스 전까지 1달 반 정도 머물 예정이다. 매번 크리스마스를 같이 보냈던 절친 녀석이 이번만은 따로 보내자며 일찌감치 방콕 행 티켓을 끊었는데, 내가 태국으로 오는 바람에 또 기어이 함께 크리스마스를 보내게 되었다. 친구와 함께 방콕-끄라비를 여행하고, 마음에 드는 남쪽 섬 어디선가 1달 정도를 보내게 될 것 같다.
치앙마이의 첫날은 님만해민의 BAKE ROOM이라는 한국인 사장님이 운영하는 게스트하우스에서 묵었다. 님만해민을 내 마음 속 1번 거주지로 정했기에, 이것저것 정보를 얻을 요량으로 선택한 곳이었는데, 사장님께서 스타크레프트(게알못이라 맞는지 모르겠지만..)에 심취해계셔서 이야기를 나눌 시간은 별로 없었다. 1층에 성능좋은 컴퓨터 4대가 있었는데, 한국인 장기 거주자들이 언제나 사이좋게 편먹고 게임 중이었다. 대한민국이 게임 강국인 것에는 정당한 이유가 있었다.
짐을 일단 내려두고, 내일부터 한달 반 동안 지낼 숙소를 보러 가기로 했다. 인터넷으로 후기나 위치, 가격 등을 살펴본 후, 님만해민에 있는 P.T.Residence로 잠정적으로 결정을 내린 상태였다. 예약이 가능한지 물어보니 가능하지만 디파짓을 내야한다고 답변이 왔었지만, 일단 방을 본 후에 정하고 싶어서 꾸역꾸역 미뤄두었다. 사무실에 얼굴을 드밀고, 방을 좀 보고싶다고 했더니 이름이 뭐냐고 묻는다. 이름 말해봤자 모를텐데?라는 생각으로 우물쭈물 말하니 내가 보낸 메일 내용이 적힌 쪽지를 보이며 씨익- 웃는다. 여러번 메일 보내 질척거린 보람이 있었다.
방은 생각보다 만족스러웠다. 나무가 보이는 쬐끄만 테라스에 전반적으로 깔끔하고 침대도 폭신하다. 그런데.. 치명적인 문제가 있었으니 그 폭신한 침대가 하나가 아닌, 두개라는 점이었다. 사무실에 내려가 더블룸 없냐고 하니, 지금 모든 방이 나갔고 유일하게 남은 방이란다. 머리를 열심히 굴려 싱글룸의 장점을 생각해보았으나, 이 더운 날씨에 이불을 두 개 덮을 수 있다는 것 말고는 없었다. 그러나 ‘the only last one’이 주는 묘한 초조함에 이끌려 30초 정도 고민을 한 후, 덜컥 계약하기로 한다. 더블룸이 어베일러블한 상태이면 바꿔준다는 조건 아래였다.
방값은 스탠다드룸이 한달에 9,000바트. 한화로 30만원 정도이다. 인터넷과 일주일에 한번있는 클리닝 서비스, 타월 교체 등이 포함된 가격. 내가 계약한 방은 그보다 쬐끔 업그레이된 방이라 한달에 10,500바트였는데, 9,000바트에 해주기로 했다. (다시 말하지만, 메일을 열심히 보낸 보람이 있다.) 디파짓은 10,000바트로 현금만 가능하다. 그간 놀러오겠다고 빈말을 던진 친구들에게 침실 사진을 보내주며 꼭 놀러와야하는 이유가 생겼다며 압박감을 주기로 한다.
치앙마이에 있을 동안 가장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했던 '숙소 구하기'를 삽시간에 끝내고, 뿌듯한 마음으로 베이크 룸으로 돌아왔다. 이 숙소의 최대 장점이라고 하면 피씨방 사양의 컴퓨터도, 조식으로 나오는 뜨끈한 닭죽도 아닌.. 바로 요 녀석이라 할 수 있다.
‘또또’라는 페르시안 고양이. 존재감없이 슬그머니 출몰하여 게스트들과 놀아준 뒤 유유히 사라지던 녀석.
다음 날 일어나 녀석과 한바탕 신나게 놀아준 후, 다시금 배낭을 짊어지고 한동안 내 집이 되어줄 숙소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