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성한 예식이라도 치르듯, 흰 장갑을 끼어야 할 것 같은 마음이 든다.
아침에 인스타를 보다가 한 시간이 지난 걸 알았다. 핸드폰은 잠깐만 봐야지가 어렵다. 몸과 마음이 나약해지면 자극에 취약해진다. 핸드폰 감옥 구매를 또 고려한다. 기운도 없고 귀찮아서 점심은 그냥 냉동실에 있는 김치만두나 데워 먹으려고 했다.
그때 내가 태그된 스토리를 보았다. 동네서점 니어바이북스에서 올려주신 재입고를 해달라는 메시지였다. 내 책을 벌써 다섯 명이나 사 갔다니. 누군가 내 책을 읽는 상상에 가슴이 설렌다. 포장하겠다는 메시지를 남기고, 책 포장을 하기 위한 밑 작업을 한다. 부엌 청소. 식탁에서 포장하는데, 반드시 부엌이 정리되어야 포장을 할 수 있다(평소에 해두면 좋을 텐데). 쓰레기를 모으고, 물건을 정리하고, 청소기를 돌린다.
벌써 점심시간. 일단 배가 고프니 점심을 먹는다. 밥을 해야겠다는 마음이 든다. 아까는 대충 때우려 했는데 흰 쌀밥이 아니라 흑미와 렌틸콩까지 넣고 쌀을 씻는다. 건강해야지 책도 포장하고 글도 쓰고 그림도 그리고, 어? 할 일을 할 거 아닌가? 암튼 날 좀 잘 먹여야겠다고 생각하며 검정과 주황이 블랜딩된 쌀을 씻고 뽀얀 물을 버린다. 자동 솥 밥이라 청소를 마무리하니 금방 밥이 되었다. 맛있게 된 밥을 반찬가게에서 사 왔던 반찬과 총각김치 두 줄기를 그릇에 덜어서 맛있게 먹는다.
이제 포장을 할 차례. 포장에서 가장 중요한 작업은 우리 집 계단에 늘어선 책 중에 파본이 아닌 양품의 책을 골라내는 것이다. 슬프게도 첫 인쇄에 파본이 많다. 나만 신경 쓰이는지 모르지만, 그냥 보내기에는 마음에 꺼려져 한쪽으로 골라낸 책들이 거대한 책 무덤처럼 쌓였다. 점점 많아져 어떻게 처리할지 고민 중. 어쨌든 흠이 없는 다섯 권의 책을 들고 내려와 식탁 위에 내려놓는다.
신성한 예식이라도 치르듯, 흰 장갑을 끼어야 할 것 같은 마음이 든다. 식탁 위에 부록들을 정갈하게 늘어놓는다. 포장하기 좋은 순서대로 놓다가 냉이 구별법이 없다는 걸 깨닫는다. 커팅매트, 칼과 스틸 자를 꺼낸다. 프린트 해놨던 냉이 구별법을 신중하게 접고 자른다.
반투명 유산지 봉투에 책과 냉이 구별법과 엽서와 스티커를 차례차례 순서에 맞게 조심히 넣는다. 반투명 유산지는 전에 일러스트 페어 때 다른 부스에서 받아보고 나중에 내 책 포장할 때 꼭 써야지 마음먹었다. 생각보다 튼튼하지만 거칠게 다루면 안 될 것 같아서 최대한 살살 넣는다. 내 책이 기분 좋은 선물이 되면 좋겠다.
케이크 가방에 포장한 책 다섯 권을 넣는데 공간이 많이 남는다. 축하와 달콤한 선물 느낌의 케이크 가방과 입고를 연결한 게 마음에 들어서 입고할 때 꼭 케이크 가방에 담고 있다. 우연히 1박 여행 갈 때 케이크 가방에 무거운 짐을 가득 넣고 간 적 있는데 아주 튼튼했다. 바닥이 넓어서 책을 담기 좋고 완충재도 둘려 있어 책이 보호된다. 완벽한 입고 가방이다. 힘을 얻은 손에 든든한 케이크 가방을 들고 입고하러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