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세상은 아무도 손가락질하지 않고

무소음 키보드를 타닥타닥

by 키므네

오늘도 어제처럼 새벽 3시에 눈을 떴다. 이유는 알 수없지만 아이들 사이에 불편하게 낀 자세다. 하루를 시작하기엔 애매한 시간이지만 정신이 말똥해 다시 잠들 것 같지 않다. 어제 아이들을 재우고 핸드폰을 하며 졸다가 곯아떨어진 바람에 충전하려고 이불속을 더듬어 찾지만 잡히지 않는다. 일어나면 찾아질 거야. 결국 일어나기로 결심하고도 다시 휴대폰을 뒤적거리며 찾다 포기하고 일어나 화장실로 간다. 다시 돌아와 보니 역시나 이불 위에 핸드폰이 고스란히 놓여있다. 가습기는 저 멀리서 멀뚱하니 꺼져있다. 나는 우리가 누운 자리 쪽으로 가습기가 놓인 의자를 들고 옮겨와 가습기 뚜껑을 열고 그 안에 5분의 1쯤 남은 물을 버리고, 새로 받는다. 뚜껑을 닫고, 가습기 코드를 침대 옆에 꽂고 작동 버튼을 켠다. 오늘도 어제에 이어 강추위다. 방의 보일러 온도를 0.5도 높이고, 어쩐지 꺼져있는 발열 매트 전원을 켜 4인지 확인한다. 그리고 도사관에서 빌려온 리디아 데이비스의 책을 읽기로 한다. 책을 읽다가 휴대용 키보드를 꺼내온다.



키보드로 쓰다 보니 오늘 도서관에서 이 키보드를 꺼내 ‘마트에서 울뻔한 이야기’라는 감동 사연의 글을 세 줄 정도 쓰다가 내 앞의 여자가 사라지고 도서관 사서가 나에게 와서 말 건 일이 생각난다. 직원은 정중한 말투로 혹시 작업이 오래 걸리실까요? 예? 아뇨 왜… 혹시 금방 끝나실 작업일까요? 아, 혹시 시끄러운가요? 아, 네. 오래 걸리실 작업이시면 위층에 멀티미디어실에 가시면 오래 편하게 작업할 수 있으세요. 아, 네. 알겠습니다. 나는 당황하지 않았다. 주섬주섬 짐을 챙기다 보니 역시 내 앞에 앉은 여자가 돌아오리라고 여겼을 때 그녀가 역시 돌아왔다. 여자의 얼굴은 보지 않았지만 나는 그녀가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키보드가 무소음이라고 해서 샀는데 지금 모두 잠든 침실에서 키보드로 적으니 소리가 시끄럽게 느껴지긴 한다. 키보드를 판 사람도, 키보드를 사용한 나도, 내 키보드를 시끄럽다 여긴 여자도, 도서관 직원도 죄가 없다.


내가 여기서 중요하게 여기는 건 바로 이거다. 나는 지적받았으나 얼굴이 빨개지지 않았고, 그 일에 참여한 모든 사람들을 이해했고, 자리를 옮겼고, 그 키보드에 얽힌 사건과 상관없이 밤에 자다 깨어 키보드를 사용하고 사랑해 줄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이다. 집에 오는 길에 그 일에 대해 생각할 때, 왜 이제 나는 내 존재를 부끄러워하지 않는지 궁금했다. 어린 나는 내 행동에 대한 작고 사소한 지적하나에 온 세상이 나를 비난하는 것 같은 수치심에 사로잡혔다. 지금 보기엔 이상하리만큼 과도한 반응이었는데 나에겐 늘 겪는 익숙한 태도였다. 세상엔 자기 존재의 수치심을 더 고통스럽게 느끼는 사람들이 있는 게 아닐까. 키보드를 지적받기 30분 전에 들린 카페 사장님은 내가 잘한 것도 없는데 나를 늘 호감의 눈으로 보았고, 그곳에 일하는 카페 사장님의 엄마도, 직원도 그런 것으로 보아 아마도 나에 대해 뭔가 좋은 이야기를 나눈 것 같았다. 내가 카페에서 특별히 뭘 더 잘한 건 없는 것 같은데. 나는 내가 꽤 괜찮은 사람이라고 느낀다. 그리고 이렇게 내가 이유 없이 호의를 받는 일도 있다면 사소한 지적받는 일도 충분히 있을 수 있는 것이다.


새벽 5시. 아이들은 여전히 내 양 옆에서 쌕쌕거리며 자고 있고(한 아이는 거꾸로 누워 발이 내 얼굴 쪽으로 나와 있다.) 가습기는 얼굴에 촉촉하게 닿으며 발열 매트는 배와 다리까지 따뜻하게 해 주고, 발은 이불 밖으로 나와 기분 좋게 시원하다. 나는 엎드려 누운 자세로 베개 위에 핸드폰을 놓고 그 아래에 소리 나는 키보드를 타닥타닥 두드리며 생각을 편안히 받아쓴다. 나의 세상은 아무도 손가락질하지 않고 나도, 당신도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여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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