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국 빠이 여행 후기
방콕 장기여행 중 가장 가고 싶었던 곳은 ‘빠이(PAI)’였다. 빠이는 치앙마이와 매홍손 사이에 있는 한적한 시골 마을인데 산으로 꽁꽁 둘러싸여 있어 뭔가 대범한 기운이 느껴지면서도 꼭 비밀 아지트 같은 것이 우리나라 강원도 정선을 닮았다. 혹자가 말하기로 전쟁에 나갈 코끼리를 돌보던 마을이 지금의 전 세계 예술인들이 사랑하는 여행지가 된 건 화가, 조각가, 음악가 등 일본인 히피들이 정착하면서부터라고 하는데 마을이 유명해지자 그들은 미련 없이 이곳을 떠나버렸다고 한다. 진위여부야 확인할 수 없겠지만 어쨌건 빠이는 그냥 시골 마을이라고 하기엔 독특하고 신비한 분위기가 감도는 곳이었다.
나의 빠이 여행은 내 친구 혜민이와 윤서 언니의 간절한 바람(?)이기도 했다. 심지어 윤서 언니는 “제발 꼭 가달라”고 내게 부탁했다. 사실 그것보다는 세계에서 잘생긴 남자는 다 모여있는 것 같았다는 그의 여행 후기가 더 끌렸지만 쉽사리 떠날 순 없었다. 치앙마이에서 빠이로 향하는 762개의 코너 길이 내 발목을 붙잡은 것이다.
나는 밤을 새우고 비행기를 타도 두 눈이 말똥말똥할 정도로 잠자리를 가린다. 게다가 직진 도로도 아닌 구불길을 3시간 동안 견뎌야 한다니. 굳이 겪어보지 않아도 될 일에 돈과 시간을 쏟기보다 누군가 담아온 빠이의 풍경 사진이나 영상을 보는 것이 더 현명할지도 모르겠다고 스스로를 위로했다.
그랬던 내가 빠이에 가게 됐다. 방콕 돈므앙 공항에서 치앙마이로 향하는 오전 5시 비행기를 예약하고 멀미약도 구입했다. 하필이면 여행 전날 급체를 하는 바람에 걱정은 배가 되었지만 어쨌든 주사위는 던져졌기에 나는 갖은 방법을 동원해 체기를 가라앉혔다. 우여곡절 끝에 비행기에 올라타 나는 태국의 하늘을, 그곳에 찾아오는 아침의 풍경을 넋 놓고 바라보다가 치앙마이에 도착했다.
치앙마이 공항은 기차역처럼 작고 귀여웠다. 경비행기를 타면 빠이까지 30분이면 도착할 수 있지만 고소공포증 따위 없는 가난한 여행객은 저렴한 미니밴을 이용하기로 했다. 블로그에서 검색한 대로 치앙마이 공항에서 15분여를 달려 빠이 행 미니 벤을 탈 수 있는 아케이드 터미널에 도착했다. 빠이 여행 후기를 다룬 블로그 포스팅에서 ‘미니 벤의 앞자리를 사수하는 것이 관건’이라 했건만 예약을 하지 않아 뒷좌석만 남은 상황. 나같이 준비성 없는 여행객에겐 마음을 단단히 먹는 것, 멀미약의 효능을 확신하는 것 외에는 별다른 선택권이 없었다.
전날 약국에서 일러준 대로 탑승 10분 전에 멀미약 한 알을 먹고 나는 부디 이 여행이 무사하기를 바라며 참회하는 마음으로 미니 벤에 탑승했다. 처음엔 그럭저럭 괜찮았다. 처음 방문한 치앙마이의 풍경이 참 멋졌다. 하지만 얼마 가지 않아 악명 높은 구불길이 펼쳐졌다. 아마도 미니 벤 기사에겐 바쁜 일이 있었던 것 같다. 아니 분명하다. 새벽 비행기를 타느라 잠을 자지 못해서 졸음은 쏟아지는데 기사는 내 맘도 모르고 급브레이크를 밟으며 코너를 돌았다. 도저히 몸을 가눌 수 없어 내내 휘청거리다가 다행히 한 휴게소에서 잠시 휴식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맨손 체조로 피곤한 몸을 달래고 구글 맵으로 남은 거리를 확인했다. 그리곤 이제 겨우 반 밖에 안 왔다는 것을 확인하고 또다시 좌절. 하지만 어쩌겠는가.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계속 가는 수밖에.
오전 7시 30분에 출발한 미니 벤은 726개의 코너를 무사히 통과해 오전 10시에 빠이에 도착했다. 보통 3~4시간이 걸리는 거리를 2시간 30분 만에 달려온 것이다. 그때는 힘들었지만 덕분에 나는 빠이를 다녀온 여행객들에게 총알 미니벤을 타보았노라고 자랑할만한 것이 생겼다. 빠이에서 3박 4일의 여행을 마치고 돌아갈 때도 나는 미니 벤을 이용했고 효과 좋은 멀미약 덕분에 기사가 나눠준 검은색 비닐봉지를 열어볼 일 없이 무사히 터미널까지 도착할 수 있었다.
후에 들은 이야기인데 원래 우리나라의 한 기업에서 치앙마이에서 빠이까지 닿는 고속도로 건설을 태국 쪽에 제안한 적이 있다고 한다. 하지만 보다시피 그 이야기는 결국 무산되었다. 빠이에 살고 있는 이들은 물론 (사실 여부를 확인할 수는 없지만) 태국 국왕마저도 이를 반대했다고 한다.
762개의 코너를 지나야 만 닿을 수 있는 곳 빠이. 하지만 나는 762번의 위기를 견딘 끝에 마땅한 관광지도 없고 오토바이 말고는 별다른 교통수단이 없어 불편하고 낡고 허름하기 짝이 없는 이곳에 (나를 포함한) 수많은 사람들이 빠져드는 그 이유를 발견할 수 있었다. 여행이란 어쩌면 맛있는 음식, 멋진 장소, 편안한 쉼이 아니라 그곳으로 향하는 여정 그 자체인지도 모르겠다. 이곳에서 예술을 하며 터전을 일궜던 일본인 히피들은 눈으로만 보려고 하는 게으름이 얼마나 많은 것들을 앗아가는지 알아서, 소중한 것들을 지키기 위해서는 직접 가보는 것 외에 별다른 방법이 없다는 걸 알기에 다시 먼 길을 떠났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