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만색 샌들

방콕 차이나타운 방문기

by 김유례

나의 과도한 준비성을 대변하는 것이 있는데 바로 여행 가방이다. 나는 당일치기든 4박 5일이든 여행을 떠날 땐 꼭 큰 트렁크를 챙겨 마치 이사를 가는 사람처럼 집을 나서곤 했다. 방콕 장기 여행을 떠날 때도 마찬가지였다. 트렁크의 무게만 25kg이었고 기내에 들고 탄 배낭은 무려 18kg이었다. 이밖에 노트북 가방, 보조 가방 등을 챙기느라 방콕에 도착한 후 무릎과 발목이 시큰거려 나는 한동안 오래 걷질 못했다.


그래도 부족함 없이 챙겨 와서 다행이라고 생각했건만 대단한 착각이었다. 꼭 챙겨왔어야 했는데 깜박한 물건도 있었고 여행이 끝날 때까지 한 번도 입지 않은 옷도 여러 벌이었다. 심지어 이걸 왜 들고 왔을까 싶을 정도로 쓸데없는 물건도 꽤 많았다. 방 한쪽에 산처럼 쌓인 짐을 들고 다시 한국에 돌아갈 날을 생각하면 안 봐도 뻔한 고생길에 한숨부터 나왔다.


짐 부피만 키웠을 뿐 가장 활용도가 낮았던 건 6켤레의 신발이었다. 딱 한 켤레, 까만색 샌들을 빼고 나머지는 거의 신어본 일이 없다. 까만색 샌들은 2년 전 여름에 동네에서 구입한 건데 굽이 적당해서 오래 걸어도 괜찮고 디자인이 깔끔해서 어떤 옷과도 잘 어울려 여행의 대부분은 그 신발을 신었다. 이미 한국에서도 여러 번 수선을 받았을 정도로 낡았었던 터라 방콕에 와서도 신발용 본드로 연명하는 신세를 면할 순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이 까만색 샌들과도 이별하는 날이 오고야 말았다. 왓 싸켓(황금산 사원)에서 약 30분 정도를 걸어 차이나 타운에 도착했는데 장대비가 쏟아졌다. 급하게 비를 피할 곳을 찾다가 하마터면 넘어질 뻔했는데 순간 왼쪽 신발의 버클이 완전히 떨어져 버렸다. 밤이 되면 화려한 불빛으로 가득해진다는 차이나타운의 정경을 포기할 수 없었지만 설상가상으로 주변 가게도 문을 닫을 시간이라 신발 가게를 찾기 어려웠다.


얼마나 헤맸을까. 이제 그만 포기하고 집으로 갈 택시를 타기 위해 골목을 빠져나왔는데 저 멀리 신발 가게가 보였다. 나는 그곳에서 알록달록 구슬이 달린 100밧짜리 슬리퍼를 구입했다. 망가진 까만색 샌들은 주인에게 양해를 구하고 그곳에 버렸다. 슬리퍼를 신고 나는 두발 가볍게 차이나타운 곳곳을 돌아다녔다. 활기가 가득한 시장거리, 신기한 광경에 두 눈이 동그래진 관광객들의 모습 등 만약 내가 까만색 샌들을 버리지 않았다면 보지 못했을 정겨운 모습들이 그곳에 있었다.

언젠가부터 나는 필요 이상으로 예민해졌고 자주 화가 났다. 상대를 차단하거나 대화를 단절하는 식으로는 나의 상태를 해결할 수 없다는 걸 알았을 때 나는 결국 도피를 택했다. 주말 없이 밤낮으로 일하느라 몸이 많이 상하기도 했지만 문제는 상황이 아니었다. 내가 끊어내지 못한 두려움과 불안이, 꼭 끌어안은 과거의 상처가 나를 짓누른 탓이었다. 스스로에게 지운 무게를 견디지 못해 쓰러지고 나서야 무언가 크게 잘못됐다는 걸 깨달았다,

비록 100밧짜리 슬리퍼는 굽이 없어 멋이 나지 않고 내가 입고 있던 옷차림과도 영 어울리지 않았지만 차이나타운을 돌아보는데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슬리퍼든 샌들이든 살아가는 일을 제외하고는 애초에 중요하지 않은 것들이었다. 그러고 보니 잡동사니라도 불러도 무방할 여행 가방이 나의 과도한 준비성을 대변한다는 말도 대단한 착각이었다. 모든 시작에 끝이 있다는 것을 믿지 못하고 주워담은 미련함일 뿐이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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