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표출은 표현이 아니다

방콕 장기 여행에서 배운 소소한 깨달음들

by 김유례
KakaoTalk_Moim_6cxGBYX3jiYsakcifmGUPkdun6GHE6.jpg

여자라면 대부분 공감하겠지만 나는 약속 자체보다 나가기 전 나를 치장하는 시간을 더 좋아한다. 방콕에 머무는 동안 특히 영화 시사회를 비롯해 각종 파티에 참석할 땐 안 하던 팩도 하고 몇 시간 동안 메이크업과 헤어를 손봤다. 그때마다 어김없이 비가 내려 파티에 도착했을 땐 공들인 헤어와 메이크업이 사라진 지 오래였다. 태국 사람들은 자신의 사업의 성과를 자랑하기 위해 이런 파티를 열곤 한다는데 급 초라해진 나와 달리 파티 현장은 그야말로 성대했다. 맛있는 음식과 술이 끊임없이 제공됐고 태국의 유명 탤런트, 가수들이 자리를 빛내고 있었다.


그렇게 화려한 파티가 끝나고 나면 이상하게도 허기가 졌다. 그래서 나는 집에 돌아가자마자 라면을 끓여먹었다. 배가 좀 차고 나면 결국 남는 건 사진이라고 열심히 찍어둔 셀카(self camera)를 살펴보고 그중 가장 마음에 드는 사진을 SNS(Social Network Services/Sites)에 올렸다. 셀카는 나의 일상을 기록하는 목적도 있지만 사실 예쁘고 화려한 장소에 있는 나의 모습을 자랑하는 것이 더 큰 이유였다. 나는 어리석게도 그 사진들이 나라는 사람을 대변해주길 기대했다.


KakaoTalk_Moim_6cxGBYX3jiYsakcifmGUPkdun6Op58.jpg
KakaoTalk_Moim_6cxGBYX3jiYsakcifmGUPkdun72qFY.jpg

방콕 외곽의 톤부리 근처 클롱 뱅 루앙(Khlong Bang Luaug)에 갔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200년 된 목조 주택과 그 사이를 유유히 흐르는 운하의 풍경을 감상하기보다는 셀카를 찍어 앨범을 채우기에 바빴다. 날짜를 잘못 맞춰가는 바람에 클롱 뱅 루앙에 있는 갤러리 겸 카페 ‘더 아티스트 하우스(The Artist House)’에서 열리는 무언극은 볼 수 없었다. 그냥 돌아가기 아쉬워 나는 시간을 때울 겸 하얀 석고 모형에 색칠을 하는 간단한 체험을 했다.


메이크업할 때 사용하는 브러시 외에 미술용 붓을 든 건 참 오랜만이었다. 주인아저씨가 물통과 붓, 팔레트 등을 준비해줬지만 나는 한동안 하얀 달 모양 석고를 그저 멀뚱멀뚱 바라봐야 했다. 막상 붓을 들고나니 그것을 어떻게 칠해야 할지 어떤 그림을 그려야 할지 어리둥절해졌기 때문이다. 그때서야 나는 그동안 꾸밀 줄만 알았지 정작 나라는 사람이 무엇을 생각하고 바라는지에 대해서는 깊게 고민해 본 적이 없었다는 걸 깨달았다.

KakaoTalk_Moim_6cxGBYX3jiYsakcifmGUPkdun6ftC2.jpg
KakaoTalk_Moim_6cxGBYX3jiYsakcifmGUPkdun5GPg6.jpg

방콕 문화예술센터(Bangkok art & Culture Center)와 MOCA(Museum of Contemporary Art)라고 불리는 방콕 현대미술관은 사람보다는 그림이 많은 한적한 곳이었다. 난생처음 보는 작품들이었지만 그것이 썩 낯설지 않았다. 그곳에 전시된 그림, 사진, 조각, 멀티미디어 작품 등 다양한 형태의 예술품에는 그들이 생각하는 삶, 죽음, 깨달음 등의 의미가 고스란히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지금까지 '자기표현'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은 사실 '표출'이었다. 표출은 욕구 등의 감정을 직설적으로 나타내는 것이기에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겉으로 드러남과 동시에 이내 힘을 잃는다. 하지만 표현은 다르다. 표현은 통찰한 사람만 할 수 있는 것이기에 깊이가 있고 공감을 일으키고 마음에 닿는다. 서른이 넘은 딸의 뒤늦은 일탈이 걱정스럽고 불안했으면서도 “편히 있다가 와”라고 말한 부모님의 애정 어린 표현처럼. 받은 감동을 마음에 두지 않고 이제는 나도 끄집어내야 할 때인 것 같다. 표현은 쉽게 흩어지지 않고 상대로 하여금 힘을 얻게 할 테니까.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방콕 수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