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의 단상
돌아가도 딱히 할 일이 없다는 건 이미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마치 시간에 쫓긴 사람처럼, 아니 그렇게 보이길 원하는 사람처럼 아직 한참 남은 커피를 잔에서 모두 따라버리고 아직 온기가 남은 컵은 (크게 소용이 있을진 모르겠지만) 아르바이트생이 서있는 위치에 가깝도록 뒀다.
서둘러 짐을 챙겨 나오자마자 건너편 옷가게의 테디베어 코트가 눈길을 끌었다. 이번 겨울에 크게 유행했고 게다가 할인가에 판매한다고 하니 한 번쯤 둘러볼 만도 했지만 나는 유행에 무심한 사람처럼 무관심한 표정으로 지나쳤다. 사실은 그 뒤로 보이는 흰색 셔츠 때문이었다. 사람들이 오가는 거리, 덩그러니 놓인 행거에 먼지를 잔뜩 머금고 옷걸이에 억지로 목을 매달고 있는 테디베어 코트가 불쌍해서인지, 유리창 너머로 잘 다려진 빳빳한 흰색 셔츠가 너무 얌체 같아 보여서인지 지금도 잘 모르겠다. 어쨌든 봄이 오는가 싶어 겨울을 거둬들이는 일은 하지 않기로 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한 여인의 거무죽죽한 립스틱 색이 유난히 튀었다.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멈춰 선 일행들 앞을 나는 영 성가시다는 듯 지나쳤다. 사람들이 잘 오가지 않는 유령 빌딩에는 온갖 광고지가 덜렁이고 있었다. 붕어빵 가게에 들려볼까 하다가 막상 근처에 다다르니 생각이 바뀌어 그대로 가던 걸음을 계속했다. 걸음이 느린 노인들 서넛이 좁은 보도를 꽉 채운 채 느릿느릿 걸었다. 차마 그 앞을 잘난 척하듯 지나갈 수 없어 종종걸음을 걷다가 작은 틈새로 부리나케 빠져나갔다.
집 앞에 거의 다다랐을 때 한 꼬마 아이가 훌쩍 대형버스에 올라타는 모습을 봤다. 이동식 도서관이라고 적혀있었다. 사거나 팔지 않아도 마음이 나눠지는 곳이 있구나 안심했다. 오늘은 에고와 셀프에 대한 단상과 에밀리 디킨슨의 시집 중 일부를 읽었다. 일요일에 만났던 친구의 말을 곰곰이 생각하다가 내용이 다를 뿐 결국 그것을 두려움이라고 부르는구나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