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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이산과 규장각 각신들의 나날


정조는 규장각을 자신이 직접 책임지고 관리하고 운영하면서 조직과 기능을 늘려갔습니다. 초기에는 책임자로 제학 2명, 직제학 2명, 직각 1명, 대교 1명 등 6명을 두었고 이들을 칭하여 각신이라고 불렀습니다. 여러분들이 좋아하는 드라마 중에 당대 최고의 꽃미남이 나왔다고 하여 화제가 되었던 드라마 ‘성균관 스캔들(KBS 2 TV, 2010)’ 아시죠? 거기에 나왔던 아이들이 훗날 규장각 각신이 된다 아닙니까? 노론, 소론, 남인, 또 중인 출신으로 신분과 당색이 다른 아이들이지만 나라를 위하는 마음은 같았던 그들이 나중에 각신이 되어 일구어갈 우리나라의 미래가 아름답지 않겠어요? 픽션일지언정 보는 내내 흐뭇했답니다.





마침내 이들을 위한 직제인 검서관 제도가 신설되고 초창기 검서관으로는 이덕무, 유등공, 박제가, 서이수 등이 임명됩니다. 이들은 모두 서얼 출신이죠. 검서관들은 이제 ‘규장각 사검서’라고 불리며 조선의 지식계를 주도하기에 이릅니다. 사검서의 탄생이 어떤 의미를 가지냐면 조선은 사(士)-농(農)-공(工)-상(廂)의 네 신분제도가 뚜렷하게 나눠진 사회입니다. 이것은 성리학적 질서이기 때문에 이 시대 사람들의 세계관과 같죠.




바꿀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중에서 차별받는 위치에 있는 서얼들이 가장 똑똑한 인재들만 들어갈 수 있다는 규장각의 관리로 선발된 것입니다. 물론 이들이 신분의 한계를 초월한 것은 아니죠, 그래도 그들의 능력이 일국의 가장 어른인 왕에게 인정받은 겁니다. 이로써 조선 사회는 한층 더 개방적인 사회로 나갈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죠. 어떤 일이든 시작이 중요한 겁니다. 비록 네 사람밖에 되지 않지만 이들이 가진 능력과 상징성은 경직된 조선사회에 신선한 바람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합니다.



정조 이산의 규장각 각신들에 대한 대우는 특별했습니다. 수시로 각신들과 검서관과 어울려 학문을 토론하는가 하면 생활에 필요한 물품들을 하사하기도 했습니다.



규장각 각신들은 근무할 때 관을 쓰고 일했으며 외부인이 와도 자리에서 일어나지 말라는 규정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국왕을 아침, 저녁으로 대할 수 있었고 각종 경연에도 참여하여 그들이 가진 학문적 역량을 발휘할 수 있었습니다. 이들은 삼사(사헌부, 사간원, 홍문관) 관리들의 부정을 탄핵할 수 있는 권한도 있었지만 각신들은 탄핵제상에서 제외되었습니다. 이들이 공무 중일 때는 체포 또는 구금되지 않는 특권 또한 주어지죠. 말하자면 이들은 정조 이산의 분신과 마찬가지인 존재였습니다.



규장각 각신제도가 자리를 잡자 정조는 젊은 관리들을 규장각에서 재교육을 받는 초계문신제도를 만듭니다. 초계문신은 37살 이하의 젊은 중간관리들을 뽑아 3년 동안 규장각에서 교육을 시키는 제도인데 초계문신이 되면 그 관리는 한동안 본래 직무를 보지 않고 연구에 전념하는 시간을 가집니다. 이들은 한 달에 두 번 구술고사를 치렀고 한 달에 한 번 필기시험을 보아야 했죠. 학자 군주라는 명칭에 걸맞게 정조 이산이 직접 시험문제를 내고 답안을 매기기도 했는데요,



임금이 직접 내는 문제, 신하들이 절대 놀 수 없겠죠. 이들이 공부한 방식은 사서삼경을 무조건 달달 외우는 것이 아닌 자유로운 해석과 토론으로 풍부한 사고력을 기르는 쪽으로 진행되었다고 합니다. 공부는 어려웠겠지만 그래도 공부 좋아하는 사람들은 규장각에 머물며 제대로 공부할 맛났을 거라는 생각도 드는군요. 이들은 공부만 하는 게 아닙니다. 40세가 되면 졸업을 하고 배운 것을 국정에 적용해야 했습니다. 모름지기 공부의 완성은 실천이니까요. 초계문신에 대한 여러 가지 에피소드가 있는데 여러분이 잘 아시는 다산 정약용이 초계문신 출신이죠.



우리나라 대학가에서 유행하는 술 사발 문화가 이때에 유래되어 번진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정조 이산은 매달 치르는 시험에서 1등 한 자에게 술을 하사했다고 합니다. 다산 정약용은 자주 시험에서 1등을 했었는데 문제는 다산이 술을 못하는 범생이었다는 사실. 그럼에도 정조 이산은 술을 자주 권했다고 하는데 1등을 해서 임금이 내려주시는 술을 거절하자니 그렇고 먹자니 속이 쓰리고 괴로웠다고 훗날 아들에게 즐거운 듯 토로합니다.











창덕궁 가장 후미진 왕의 정원, 그곳에서도 가장 아름답다는 후원에 지어진 규장각과 부용지, 이 곳에서 정조는 신하들과 시 내기를 하고, 진 사람은 실제로 부용지 가운데의 섬에 유배 되기도 했다는.....일화가 전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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