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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완 May 22. 2020

<인터뷰> - 자극조차 취하지 못한

2017. 08. 27.

새삼스럽게 부제를 붙여봤다. 전부 SNS으로 간결하게 써놓은 내용을 서사적으로 연결하는 일 뿐이라 새롭게 적어넣을만 한 게 제목 정도밖에 없기 때문이다.



 가정폭력에 관한 단편을 쓴 적이 있다. 원래 페이스보다 훨씬 급하게 쓴 기억이 나는데 왜냐면 입시 스트레스를 한꺼번에 몰아넣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초고보다 잔혹해졌고, 비참해졌고, 아무도 재밌게 읽어주지 않았다. 친할머니로부터 반평생을 학대당한 주인공이 성인이 되었다. 잘 커서는 동거하는 애인을 날마다 폭행한다. 그는 정신과 상담도 주기적으로 진행하지만, 나아지는 건 없다. 그런데 애인을 때리는 그의 손목이 어느날부터 말을 걸어오고, 온통 폭력적인 이야기로 그의 머릿속을 괴롭힌다. 그는 미쳐간다. 어느날은 감정이 너무 격해져서 애인을 때리다가, 쉼없이 지껄이는 자기 손목에 신물이 나 식칼을 하나 가져온다. 애인은 덤덤하게 그 풍경을 바라보고 있다. 주인공은 그대로 자기 손목에 식칼을 내리친다. 그 순간, 피가 팍 튀기고 살점과 관절이 어긋나는 순간, 생소한 각도로부터 격통이 침범하는 순간, 숨겨져 있던 유년시절 기억이 번뜩 떠오른다. 날아가는 그의 손목과 친할머니의 손목이 오버랩되는데, 알고보니 그가 어렸을 때 친할머니의 손목까지 똑같은 방식으로 잘라버렸던 것이다. 요약하자면 이렇다. 제목은 <손모가지>였다. 앞서 말했듯 폭력의 대물림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다. 장렬하게 실패했음을 부정할 수 없다. 평가조차 거부당했기 때문이다.



 왜 리뷰에 앞서 이런 구질구질한 방황기 시절 작품 이야기를 늘어놓느냐면, 인터뷰의 서사에도 이러한 폭력의 전이(대물림이라고 표현하기에는 애매한 구석이 있다. 나는 '대물림'을 유전자 관점에서 생각했다.)를 드러내는 전개를 보인다는 점이 흥미로웠기 때문이다. 가정폭력을 소재로 다루면 항상 언급되는 부분이다. 피해자의 가해자화. 부수적인 요소로 놓기에는 참 사소하지 않은 문제다. 뭐가 어떻든 일단 극 이야기로 들어가야겠다.



 극이 끝나고서 가장 처음으로 떠올랐던 장면은, 후반부 싱클레어 고든-맷이 틀림없이 객석을 향해 의도 담긴 대사를 던진 부분이었다. "그렇게 보고만 있지 말고 도와줘요!" 이게 <관객모독>이었다면 이 발언에 수긍했을 것이다. 그러나 관극 자체가 관객의 의지를 통한 의무임을 생각했을 때 가해자, 그것도 방관을 통한 2차 가해자가 되고 싶은 관객은 아무도 없다. 피로하다. 이 피로는 극 도입부부터 축적된 무력감이다. 주인공의 느닷없는 분노 폭발에서 의미불명으로 전개되는 신경전에 이미 기를 다 빨리고 들어간다. 그 신경전은 또 지미로 돌변한 맷과 유진의 스피드왜건을 통해 점점 더 알 수 없는 그들만의 트릭과 반전으로 이어진다. 그러다가 <어딘지 문제 있는 주인공 집안에 항상 등장하는 강압적이거나 술주정뱅이인 아버지의 폭력, 가정에서 무능력한 어머니, 도움 안 되는 손윗사람 혹은 지켜줘야 할 손아랫사람>이 등장하는 순간 마음으로 탄식하게 된다. 역시나, 여기도 먹히는 클리셰를 적용했구나.



 그래서 딱히 더할 말이 없다. 봤고, 생각했고, 실망했다. 시시한 걸 봐서 시시하게 생각한다. 넣으려는 서사, 베갯솜에 비해 베개 시트가 너무 협소했다. 그 뿐이다. 작가였다가, 아버지였다가, 정신과 의사로 마무리된 유진의 감정선에 이입할 타이밍마저 놓쳤다. 누군가는 유진을 철저한 방관자, 관찰자로 설정해 분석했는데 확실히 극중에서 그런 느낌을 받기는 했다. 그러나 이야기의 시발점이기도 한 그를 축의 바깥에 놓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지 않으면 그의 레이첼이 뭐가 되겠는가. 다중인격 연쇄살인범의 서사를 꽃피우기 위한 악세사리 쯤 될 것이다. 그는 레이첼을 버려두지 말았어야 했다. 좀 더 열정적이었어야 했다. 좀 더 루프 엔딩의 실마리를 보여주었어야 했다. 좀 더 의사가 아닌 아버지였어야 했다. 맷도 <명탐정 코난>의 '에도가와 코난'처럼 혼자 모든 트릭을 머릿속에 늘어놓고 있다는 티를 숨기지 못한 채 순전히 배우의 연기력에만 기댄 대사로 등장하지 말았어야 했다(단순하게, 대사가 너무 별로였다.). 연출도 배경색을 바꾸거나 창문에 물만 들이붓지 말고 좀 더 섬세하고 세련되게 진행되었어야 했다. 이 무대는 너무 많은 의무를 놓쳤고 너무 많은 의도를 넣었다. 한 마디로 터진 베개다. 편히 눕지 못하는 베개다.



  스치기만 해도 아픈 상처를 말하려는 건가 했다. 그런데 보고 있자니 그건 또 핀트가 안 맞는 모양이라, 상처를 쓸어서 일부러 드러내게 하려는 건가 싶었다. 그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인터뷰를 봤음에도 불구하고 인터뷰를 보지 못했다. 내 생각에 이건 회전문을 돈다고 해결될 일이 아닌 것 같다. 다시 볼 마음도 없다. 가정폭력, 아동학대 묘사. 기대를 쏟았던 그 무게까지 시시한 자해쇼로 남았다.



 뱀발. 초반에 맷이 조안을 안아드는 장면에서 손의 위치를 보고 혹시 인세스트가 아닐까 생각했다. 인물들간의 모든 서사는 안타까울 정도로 클리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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