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10. 03.
조커의 역사는 나보다 나이가 많다. 잭 니콜슨부터 히스 레저를 거친 호아킨 피닉스(야 이런...)까지. 하지만 마이클 키튼에서 크리스천 베일을 거쳐 로버트 패틴슨(!)까지 온 배트맨보다야 임팩트가 적다. 난 배트맨 시리즈 중에서 놀란 감독의 <다크 나이트>만을 좋아한 것이지 배트맨이라는 세계관이나 DC 유니버스 같은 건 안중에도 없었기 때문이다(이는 MCU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가장 맘에 드는 인물을 꼽으라면 단연 조커를 떠올린다. 난 미친 사람 보는 것을 좋아한다. 그가 억누르고 살던 본연의 광기에 휘말려 스스로에게 어떤 방식으로 먹혀 가는지를 관찰하고 있으면 내 광기도 내가 관조적으로 대할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조커>가 개봉한 뒤, 서양에서는 "찐따가 조커 봤다고 하면 피해다녀라" 식의 개그가 떠도는 것 같던데 확실히 조커는 설득적인 영화다. 이런 위험하고 미친 영화를 왜 만들었냐 하는 사람들은 그런 부분이 무섭기 때문에 난리를 피우는 게 아닐까. 그런데 나는 영상 마무리에 나온 클래식한 디 엔드 그래픽이 좀 우스꽝스러웠고, 안 미치려고 열심히 노력하다가 결국 광인의 경계에서 줄타기를 하는 광대 모습이 끝나버린 것에 아쉬움을 느꼈다. 그렇게 미쳐서 쏘고 찌르고 누르고 밀치는 광경들 속에서 일말의 카타르시스도 느끼지 못했다면 거짓말이겠지. 인간은 억눌린 타인에 자신을 대입하는 법을 아주 잘 아는 존재들이니까 말이다. 하지만 아서가 대중들이 잘 아는 쓰레기 또라이로 전락하면서(이것은 전락인가 비상인가?) 나는 난장판이 된 머레이 쇼 스튜디오에서도 아무런 감정을 느낄 수 없었다.
<다크 나이트>에서 조커의 두 가지 대사를 기억한다. 좋아하기 때문이다.
I believe that whatever doesn't kill you simply makes you "stranger"
영화는 시종일관 현실과 분간하기 어려운 망상병 환자의 일상을 반복적으로 제시한다. 반복에는 힘이 있다. 이상한 것이 멀쩡해지고 멀쩡한 것이 이상해질 수 있다. 아서는 아마 거꾸로 된 바닥을 걸어다녔을 것이다. 천장처럼 뒤집힌. 그는 자신이 중력을 거스르고 있다고 믿고 있었을 것이다. 실상 거꾸로 된 것은 그가 아니라 중력이 작용하는 세상 자체였다.
You see, madness, as you know, is like gravity.
All it takes is "a little push"
그러니까 호아킨 피닉스 조커도 상단 포스터 문구대로 'One bad day'에서 작용한 'A little push'에 의해 중력에 순응해버린 셈이다.
영화를 보고 나와서 두 시간 동안 노래방에 갇혀 있느라 기억들은 대부분 풍화되었다. 하지만 이래저래 듣고 보고 느낀 사람들이 무엇을 궁금해할 지는 안다. 하나. 아서가 불쌍하다고 느끼십니까? 둘. 영화를 보고 난 뒤 당신 자신의 광기가 내면 속에서 뻗어나오는 강한 감정을 느꼈습니까? 셋. 영화의 주제는 아서도 사실은 사연이 있었다는 느낌입니까? 넷. 그래서 무엇이 아서의 망상이고 현실입니까? 다섯. 아서는 정말 웃는 병에 걸렸던 겁니까? 아니면, 지난한 가정환경에 의한 스트레스성 발작증세 같은 것입니까? 그리고 만약 그렇다면, 이것은 병질로 치부될 수 없는 종류입니까? 여섯. 아서는 머레이 쇼에서 왜 자살하지 않았습니까? 일곱. 이것은 조커의 공식 스핀오프입니까? 이를테면, <다크 나이트> 히스 레저 조커의 과거가 이렇다고 생각해도 되는 건가요? 여덟. 뭘 더 질문해야 하죠?
이러한 물음들에 나는 한 가지 대답만 해줄 수 있을 듯 하다. 이 영화는 시리즈가 아닌 모양입니다. 그러니까 등장하는 아서라는 조커는 별개의 인물이고, 일단 브루스의 부모님이 마지막에 죽긴 합니다만, <배트맨 시리즈>를 좋아하는 사람들에의 팬 서비스 정도라고 생각하세요. 그리고 영화 속 아서에게 무슨 일이 생기든지 우선 한 발짝 물러서세요. 안 그러면 열차가 당신을 치고 지나가서 당신 자신이 누구인지도 모르게 될 것이니까요.
어쨌건 나는 <다크 나이트>에서의 조커가 단순히 선명한 악만을 바라본다는 이유로 열렬히 지지했던 경험은 전무하며, 지금도 조커라는 인물 자체는 어떻게 대하면 좋은지 방안을 찾고 있는 중이다. 나는 그가 싫지 않은데, 딱히 좋은 것도 아닌 것 같다. 미국 찐따였으면 동족혐오 따위 표현을 썼겠지만 나는 정신병만 좀 앓고 있을 뿐이지 사람을 죽이지는 않으니까. 일단은 검찰청 외벽에 빔을 쏴서 게릴라 스크린 영화제를 개최해보고 싶단 생각은 든다. 그리고 아수라장이 된 고담의 거리를 비춰주는 거다. 입장료는 짜장면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