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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완 May 22. 2020

<어스> - 어차피 스릴러

2019. 04. 02

영화관을 나서는데 어디선가 헉헉대는 소리가 들렸다. 내 숨소리였다. 후반 10분은 숨을 멈추고 본 것 같다. 아마 처음부터였을지도 모른다.



가족이 나온다. 어머니 에디 아버지 게이브 딸 조라 아들 제이슨. 보편적인 가족이다. 2018년 기준 한부모 가구는 대략 전체가구의 십 퍼센트 정도 된다. 소년소녀가정은 도의적으로는 어떨지 모르나 통계적으로는 무의미한 수준의 비율이다. 마찬가지로 2018년 기준 2030 성인 미혼자들 천여 명 중 사십 퍼센트 정도가 딩크를 계획한다는 걸 잠시 잊고 나면, 아빠 엄마 자녀. 보편적이다. 여자와 남자가 만나 콘돔 사는 걸 까먹거나 사후피임을 거르거나 어쨌든 운이 안 좋으면 애가 생긴다. 애도 운이 안 좋은 셈이다. 그렇게 가족이 가정이 생기고 가구가 늘고 국가가 생기면서 나라가 만들어졌고 미국이 나타났다.



오프닝 크레딧이 감각적이다. 격자 창살에 무수한 흰 토끼들. 효과적인 줌 아웃. 군데군데 유색 토끼들. 유색이란 말 참 웃기구나. 가물가물한 <겟 아웃>에서도 그랬던 것처럼 배경음악이 큰 역할을 한다. <Anthem>의 전주가 흘러나오는 순간 인생 처음으로 혼자 영화를 보러 온 걸 후회했다. 그런데 가사를 잘 들어보니 계이름인 것 같아서 <사운드 오브 뮤직>을 떠올리며 잠시 평화로워졌다. 물론 전혀 아니다. 작사가가 만들어낸 말이란다. 공포.

에디 역 루피타 뇽오는 편집적인 연기를 여유롭게 한다. 그리고 그 간극을 두렵게 만든다. 무슨 소리냐면 작중 에디가 정신병에 잠길 때마다 대본과는 별개로 이 배우가 PTSD 계열 정신병력 증상을 완전히 파악했구나 싶은 한 마디로 간파당한 느낌 때문에 두려워진다는 말이다. 스크린을 보는 내내 함께 공황발작이라는 롤러코스터에 합승한 에디는 정작 진짜 롤러코스터는 키가 작아 탈 수 없었다. 어릴 적 유원지에서 뒷태가 끝장나게 핫한 부모님 뒤를 따라 걸으면서 두더지 잡기 게임 대신 롤러코스터 기구 앞에 멈춰섰다면, 키가 조금만 더 컸더라면 그의 인생이 바뀌지는 않았을까. 나도 키가 오 센티미터만 더 컸다면 의자 없이 참치캔을 꺼낼 수 있지 않았을까(사실 오 센티미터로는 모자라다.). 그럼 선반을 낮게 만든다면?

조금 슬픈 사연은 뒤로하고 어쨌건, 어딘지 퉁명스럽게만 보이는 에디는 아쿠아맨을 패던 블랙만타 아버지가 치욕을 잊지 못해 두더지 모형 정수리를 패는 가학적 오락을 즐기는 동안 공 던지기 게임에서 딴 '스릴러(마이클 잭슨 作, 이것도 복선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티셔츠를 입고 코너를 돌아 산타 크루즈 해안가로 들어선다. 거기서 거울 미로 시설 '샤먼의 비전퀘스트'를 발견한다. 이때 갑자기 천둥이 치고 비가 쏟아진다. 인위적으로는 어떻게 할 수 없는(없었던) 자연현상이 에디를 거울 미로 속에 들어가도록 충동질한다. 미로에서 불미스러운 사건을 겪은 에디는 자라나 와칸다에서 후드려 맞던 남편 게이브(노잼 개그는 변함이 없다. 동질감)와 결혼해 가정을 꾸린다. 딸이 쌀쌀맞고 아들이 산만하고 남편이 재미없고 아직 불운한 과거로부터 쫓겨다니는 걸 제외하면 아주 괜찮게 사는 중이다. 여담인데 이야기 초반 게이브는 가족이 되면 사람을 돌게 만들 인간상이다. 모교 전공과목 교수님께 칭찬 받을 성격이라는 말로 설명을 대신한다.

그렇게 예고편만 보면 누구나 알 만한 사건들이 전개되고 가족은 가족과 투쟁한다. 육신이 같고 영혼도 반땡했지만 서로 전혀 다른 인간이다. 다른 시간을 보냈으니까. 인간의 조건은 뭘까. 국가의 조건인 국민 영토 주권의 삼 요소를 따라 인간도 세 가지 요건을 갖추도록 하자면, 육신 영혼 삶이 아닐까. 삶을 시간으로 치환하면 영혼이라는 부분에 태클을 걸고 싶다. 영혼이란 무엇인가. 작중에서 영혼은 연결고리 역할을 한다. 그래서 반씩 갈라 가졌다. 그러나 단적인 예로 유원지 먹거리와 토끼 날고기처럼 전혀 다른 시간을 살아서, 같은 존재이되 다른 존재가 되고 말았다. 의식은 뇌와 뇌 자체 활동으로 분비되는 어떤 신경물질에 의해 발생하지만 뇌를 꺼내 양자 단위까지 썰어봐도 도무지 그 실체는 발견할 수가 없는데, 그러니까 한 마디로 굶주림을 호소하거나 통증에 얼굴을 찡그리고 피함으로써 '굶주림'과 '통증' 의사를 표현하는 것처럼, 투명인간의 형태를 그가 뚫고 지나간 유리창의 깨진 모양으로 더듬어볼 수 있는 것처럼 오로지 간접적으로만 확인가능한 불가사의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뇌의 실존이 의식이라는 본질을 만들었다. 그러니 인간에 조건이 필요하다면 육신과 시간만으로 충분치 않은가? 뇌 있고 정신 있지 정신 있고 뇌 있나. 나는 뭔 정신으로 이걸 쓰고 있나? <어스>를 검색해서 이곳까지 오셨을 여러분들은 무슨 정신으로 살고 계신가요? 전 밀린 과제를 보니 정신의 부재상태, 즉 뇌가 필요한 만큼 활동하지 못하고 있는 상태, 다시 말해 인간이 아닌 상태인 것 같습니다. 아주 비극적입니다.

과제를 버리고 하하호호 스크린 앞에 앉아 영화를 취한 복학생을 상대로 두 시간 가량 고군분투한 에디는 안타깝게도 모성애가 발현되는 특이한 지점을 두 번이나 보여준다. 한 번은 엄브레(조라의 복제), 한 번은 플루토(제이슨의 복제.). 실상 영화는 감독 전작보다 설명이 필요한 만큼 친절한 편인데, 그래서 모성애를 지상세계를 향한 복제인간의 집착과 죄책감 정도로 해석하면 어떤가 싶다. 조명을 굳이 한 가족으로 설정한 건 엄마며 아빠며 딸이며 아들이란 게 바뀔 수 없는 귀속된 위치이기 때문 아닐까. 있어야 하고 있어도 되는 곳이기에 에디로 하여금 존재의 당위성을 찾게 만드는 것이다. 겸사겸사 가족영화인 척도 하고. 국가를 상징할 수도 있고.



Us가 U.S인 이상 도널드 트럼프든 공화당이든 초반 미국 언급 회수를 해야 하는데 복제인간 울타리 퍼포먼스와 멕시코 장벽만 연결지어도 메세지로서는 충분하지 않은가 싶다. 초반 불우이웃 돕기 인간띠 캠페인 뒤에 뜨는 게 '1986'과 광고가 지나가고 꺼진 화면 너머 보이는 흑인이라는 코미디도. 유감스럽게도 아메리칸이라는 대사를 듣는 순간 남의 나라 이야기로구나 싶어서 작품 내적으로밖에 즐길 수 없었다. 머리가 비어서 입도 비는 경험은 참 끊이질 않는군. 어쨌건 결론은 조던 필이 똑똑한 사람이란 거다. 유머를 직업적으로 성공시키는 사람은 코미디언 중에서도 그리 많지 않다. 선을 지키는 게 어려우니까. 조던 필은 그걸 해낸다. 오답을 알아야 정답을 찍듯이. 사실 유구한 남성 탤런트들의 사건사고를 생각해보면 이렇게 가타부타 칭찬하는 것도 참 위험한 일이지만 그래도 다음 작이 무엇일지는 기대가 된다.

세이브 안 하고 줄줄 써서 뭔가 나중에 쓸 거리가 더 생각날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조던 필 문단이 지워지는 일은 없길... 아디오스 조동필.



+ 조라가 도플이들 시원하게 패버리는 장면이 개그 코드로 통하는 것 같던데, 옆에서 넋을 잃고 바라보던 제이슨 때문에 난 웃을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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